1. 필리피 교회의 설립
오늘날 필리피는 폐허뿐이지만 옛날에는 번창한 고을이었다. 이 고을은 마케도니아의 동부 지역, 에게 해에서 내륙 쪽으로 이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평야에서는 농사를 많이 지었고, 또 그 둘레를 에워싼 산에는 금광과 은광도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립포스 2세가 기원전 360년경에 이 고장을 자기의 왕국 마케도니아에 합병한다. 그리고 나서 고을을 건설하고 방어 시설을 튼튼히 하여 자기의 이름을 따라 ‘필리피’라고 부르게 하였다. 기원전 31년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이 도시에 특권을 부여하고, 퇴역 군인들을 이주시켜 로마의 식민 고을로 만들었다.
바오로 사도는 49년이나 50년, 제2차 선교 여행 때에 실라와 디모테오를 데리고 필리피로 간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계속 복수 3인칭으로 이야기하다가, 필리피의 선교가 시작되는 16,10부터는 복수 1인칭으로 서술한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저자인 루가도 바오로와 함께 필리피로 갔었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때에 바오로가 소아시아에서 바다를 건너 처음으로 유럽 땅에 복음을 선포한 것이다. 그 곳에는 유다인이 많지 않아 회당은 없고, 성문 밖 강가에 “기도처”라고 불리는 곳만 있었다. 바오로는 그 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전교를 하는데, 그 가운데에는 자색 옷감 장수로 이교에서 유다교로 개종한 리디아라는 부인이 있었다. 복음을 받아들인 리디아는 강권하다시피 하여 바오로를 자기 집에 머무르게 한다. 그런데 소동이 일어난다. 바오로는 폭행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다가 마침내 그 고을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그 곳에는 대부분 비유다교 출신으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만 남게 된다(사도 16,11-40; 1데살 2,2 참조).
2. 서간 발송
이 서간에서 드러나는 다정다감한 어투를 볼 때(예컨대 1,3-8; 4,1 참조), 바오로가 필리피 교회에 특별한 애정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교회와 계속 관계를 이어간다. 다른 교회 공동체로부터는 물질적 선물이라든가 도움을 받지 않지만, 필리피 신자들에게서만은 몇 차례에 걸쳐 기꺼이 받는다(4,15; 2고린 11,8-9). 바오로는 복음을 “대가 없이” 선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2고린 11,7. 그리고 1데살 2,9; 2데살 3,7-9; 1고린 4,12; 9,15; 2고린 11,9). 그런데 필리피만은 예외로 한다는 사실은, 그 곳 교회 신도들이 특별히 형제적인 자세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바오로가 마케도니아를 떠나 그리스로 갈 때에 처음으로 그를 도와 준다. 그리고 나중에 바오로가 다시 감옥에 갇히고 물질적으로도 궁핍하다는 소식을 듣고, 선물을 모아 에바프로디도라는 신자에게 들려 보내면서 바오로를 계속 돌보아 주게 한다. 그러나 에바프로디도는 그만 병이 들어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한다. 바오로는 이 서간과 함께 그를 돌려 보낸다. 이 서간에서 사도는 자기가 사랑하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고마운 마음과 함께 소식을 전하고 앞으로의 계획도 알린다. 또한 그 곳의 공동체가 잘 성장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로 격려하고 권고한다. 아주 짤막한 필레몬서 외에는, 이 필리피서가 바오로의 서간 가운데에서 가장 친밀하고 다정한 어투로 쓰여 있다.
3. 바오로의 투옥
바오로가 이 서간을 쓸 때, 그는 앞으로 어떠한 판결을 받을지도 모르는 채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이 서간은 통상 에페소서, 골로사이서, 필레몬서와 함께 ‘옥중 서간’으로 분류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오로는 필리피에서 잠시 감옥에 갇힌 것 외에도 가이사리아에서 투옥되었다가 로마에서 수감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사도 28,16.30-31). 필리피서 자체에서는 가이사리아의 총독 관저나 그 곳의 경비대만이 아니라 로마의 황제 친위대 본부도 뜻할 수 있는 특수 용어와(1,13) “황제의 집안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쓰인다(4,22). 그래서 이 서간이 로마에서 쓰였으리라고 추측하게 된다. 이 가설이 맞을 경우, 이 서간에 나타나는 다정함이라든가 너그러움(1,15), 그리고 다가오는 위험과 죽음에 대한 초연함(1,21) 등이 바오로의 나이가 많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는 필리피서가 고린토 1서 및 2서와 같은 시기에 에페소에서 집필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도행전에는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감옥 생활을 하였다는 말이 직접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복음이 전파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사도의 생애 가운데에서 특징적인 몇몇 일화만을 전할 따름이다. 바오로는 에페소에서 두 해 이상 지내는데(사도 19,8-10), 이 체류 기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고린토에 보낸 서간들에 따르면, 바오로는 이미 가이사리아에서 체포되기 이전부터 여러 번 투옥될 뿐만 아니라(2고린 11,23), 에페소에서는 큰 위험에 빠지기도 한다(1고린 15,32; 2고린 1,8. 그리고 2고린 4,8-10; 6,9 참조). 그리고 필리피서는 여러 차례에 걸친 사람들의 왕래를 이야기한다. 필리피 신자들은 에바프로디도를 파견하고 바오로는 그를 돌려 보낸다. 그리고 디모테오가 필리피로 갔다가 그 곳의 소식을 가지고 돌아온 것 같다. 바오로 자신도 감옥에서 석방되면 필리피로 직접 가려고 한다. 마케도니아와 로마 사이의 교통은 오늘날의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에냐티아 가도(Via Egnatia)’ 덕분에 시간은 많이 걸려도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필리피서가 전제하는 빈번한 왕래는 필리피와 에페소 사이의 거리를 생각할 때에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에페소는 소아시아 서쪽의 항구 도시로 에게 해 건너편에 있는 필리피까지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다. 다른 한편, 디모테오와 관련된 바오로의 계획은 바오로가 고린토 1서에서 밝히는 내용과 부합된다. 그는 디모테오를 마케도니아를 거쳐 고린토로 보내면서 자기가 직접 그 곳으로 간다는 말을 전하게 한다(1고린 4,17-19; 16, 5-10). 이는 사도행전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바오로는 자기도 같은 길로 가리라고 결심하고서는(사도 19,21), 실제로 그렇게 여행한다(사도 20,1-2). 나중에, 그는 아시아와 동부 유럽 지방에서 해야 할 일을 다 마쳤다고 생각하고서는 먼저 로마로, 이어서 에스파냐로 가기를 원한다(로마 15,19-20.22-28).
1,13에서 특수 용어(라틴 말로는, praetorium)가 사용된다고 해서 이 서간이 로마에서 쓰였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바오로 시대에는 이 용어가 비단 로마의 황제 친위대 본부만이 아니라, 여러 부서와 법정과 감옥까지 딸린 총독 관저와 그 경비대도 가리킨다. 이러한 건물과 부대가 에페소에도 있었다. “황제의 집안 사람들”이라는 4,22의 표현도 반드시 황족만 일컫지는 않는다. 이 말은 황제의 노예들이나 노예였다가 해방된 이들까지 뜻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에페소에 많이 살았다. 이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을 것이고, 그렇게 신자가 된 이들이 바오로와 관계를 지속하였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감옥살이를 하였다는 다른 근거가 있기만 하면, 필리피서가 고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두 서간보다 에페소에서 조금 먼저 쓰였다는 것이 거의 확실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만 가지고서는 이 문제를 명확히 종결지을 수가 없다. 이 서간이 어디에서 쓰였느냐에 따라 대략이나마 언제 쓰였느냐는 문제까지 결정되기 때문에 아쉬움이 더 많이 남는다. 에페소에서 쓰였으면 집필 시기가 56년이나 57년이 된다. 이 경우, 우리가 이 서간을 통하여 보는 바오로는 나이 많은 노인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한창 투쟁하는 장년의 사나이이다. 이렇게 에페소에서 쓰였다고 할 경우, 이 서간이 왜 다른 옥중 서간들보다 오히려 로마서와 고린토서들, 심지어 데살로니카 1·2서와 내적으로 더 비슷한지 이해가 된다.
4. 친저성과 단일성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서간을 바오로가 썼다는 친저성에 관해서는 아무도 심각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단일성에 관해서는 일부 학자들이 의심을 품는다. 현재의 필리피서는, 바오로가 같은 필리피 신자들에게 써 보내긴 하였어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나 그 이상의 짧은 서간이 합쳐졌다는 것이다. 특히, 감사 서신과(1,1-3,1; 4,10-23) 유다교를 고집하는 자들에게 경고하는 서신(3,2-4,9), 이렇게 두 서간을 구분해 내기도 한다. 물론 3,1과 3,2의 연결이 매우 거칠기는 하다. 그러나 이는 바오로가 서간을 손수 쓴 것이 아니라 비서에게 받아 쓰게 하였는데 이 일을 한 번에 마치지 않고 여러 번에 걸쳐 하였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항이다. 다른 학자들은 여러 단편이 모자이크처럼 짜여져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현재로서는 어떠한 가설도 확신을 줄 만큼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기쁨이라는 주제가 서간 전체에 걸쳐 되풀이된다는 점과, 근본적인 단일성을 드러내는 다른 단서들을 볼 때, 이 네 개의 장으로 된 서간을 단편들의 모음 이상의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5. 내 용
이 서간은 논리적으로 명료하게 구성되어 있는 논문이 아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본문 사이사이에 집어 넣은 소제목들이 푯말처럼 보여 주듯이, 바오로가 펼치는 생각의 흐름은 요약할 수 있다.
바오로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필리피에 있는 사랑하는 신자들을 매우 가깝게 느낀다. 그는 서간 전체에 걸쳐 되풀이되는 주제 하나를 서두에서부터 시작한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형제들의 친교인데, 이것이 기쁨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감옥에 갇힌 바오로는 앞으로 자기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옥살이가 어떤 형태로 매듭을 짓든 간에, 복음은 더욱 힘차게 뻗어 가리라고 확신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승리의 표징을 미리 보기도 한다. 그는 사도로서의 임무를 다시 수행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신자들에게 신앙을 위한 투쟁을 굳건히 지속해 가라고 권고한다. 그러한 투쟁은 또한 겸손과 봉사의 마음으로 일치를 보존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이루어져야 한다. 필리피 신자들을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하려고 사도는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 본문 하나를 인용한다. 곧 온 세상의 주님이신 하느님께서 세우신 ‘고통받는 종’ 그리스도를 기리는 찬가이다(2,6-11).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 승리자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면서, 자기의 증인 직분을 용감하고 충실하게 이행해야 한다. 바오로는 이어서 디모테오와 에바프로디도와 관련된 자기의 계획을 밝힌다.
3장에서 바오로는 갑자기, 유다교를 고집하는 선동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이는 사도가 갈라디아서에서도 논박하는 이단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필리피 신자들이 벌써 이 이단에 물들기 시작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생긴다. 바오로가 서간 첫머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사정을 알 수는 없다. 필리피에 실제로 그러한 일이 벌어졌다기보다는, 그러한 오류가 다른 여러 교회에 피해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바오로가 필리피 신자들을 미리 조심시키려고 그리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다교주의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사람들은 단순히 유다교 규율로 되돌아가려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그러나 유다교적인 경향만이 아니라 자유방임주의적 생활의 성향도 문제가 된 것 같다. 그래서 바오로는 자기가 부활하신 분과 만난 일을 다시 이야기한다. 바로 이분께서 유다인 중의 유다인이라고 할 수 있는 바오로, 나무랄 데 없는 정통 바리사이인 바오로가 그 때까지 지니고 있던 모든 우월감을 버리도록 이끌어 주신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기꺼이 사로잡힌 그는 그리스도를 뒤따라 그분의 인도를 받으며 신앙을 위한 어려운 투쟁을 벌여간다. 바오로는 사랑하는 필리피 신자들도 자기를 본받으라고 권유한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준비하시고 또 영광스럽게 완성하실 새 세상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을 선포한 다음, 바오로는 다시 일치와 평화와 기쁨에 관한 권고를 되풀이한다. 이어서 그는 다정한 말로, 도움을 베풀어 준 신도들에게 감사의 정을 전하고, 또 자기의 운명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필리피서는 이렇게 끝난다. 이러한 필리피서는 바오로의 서간들 가운데에서 필레몬에게 보낸 짧은 서신과 함께 ‘편지’ 이상의 어조와 감정을 드러낸다. 서간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솔직한 이야기와 우정어린 충고가 사도의 사상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들을 상기시키는 말과 어우러져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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