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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바오로의 해

성 바오로 사도

 

성 바오로 사도

St. Paulus (영문명 : Paul) | 축일 : 6월 29일 | 사도, 순교자


  


St. Paul @ The Basilica
 


1. 성 바오로 사도의 생애

  

   1) 출생

  

 
   바오로 사도의 출생과 성장에 대한 정확한 사실을 알 수는 없다. 학자들은 다만 사도행전과 그의 서간에 나오는 여러 사건들을 종합하여 연대를 추측하고 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오로 사도는 킬리키아 수도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사도 21, 39; 22, 3). 언제 태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승에 의하면 바오로가 예수님보다 10 여 년 늦게 출생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바오로는 서기 5 ~10 년 사이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로마서에 기술된 바( 로마 11,1; 필리 3,5)와 같이 베냐민 지파에 속한 독실 한 유다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다 관습대로 난 지 8 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유다식 이름은 사울이며, 로마시민권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로마식 이름을 갖고 있었다. 바오로는 두 이름을 혼용하여 사용 하였다고 한다.

  

   바오로 사도는 타르수스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유다인 출신이었으므로 그 당시 공용어인 희랍어에 능통하였으며, 타르수스의 지리적·정치적 조건은 후에 그로 하여금 희랍과 로마 지역의 선교사로,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어려서부터 율법과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도록 철저히 교육받았으며, 바리사이파에 가입했고, 천막을 만드는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면서 선 교 활동에 임했다고 한다.

   


   
2) 회심

  

   신약성경에는 스테파노의 순교 후 바오로가 처음 등장한다. 그 당시 바리사이로서 바오로는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여겼으며, 다혈질적 유다인으로서 앞장서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였다(코린 1 서 15,8-9;갈라 1,13-14;필리 3,5-6). 33년경 다마스쿠스 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도중 바오로는 빛과 함께 들려 온 예수님의 목소리를 통해 예수님을 체험한 후 그리스도인으로 돌변한다(사도 9 장, 22 장, 26 장 ). 이는 바오로 사도의 삶을 좌우하는 결 정적인 사건이었으며, 자신의 회심을 하느님의 은총의 힘으로 보고, 예언자적 소명으로 여기게 된다.

  

   이 후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선교 활동을 시작한다. 36 년 경에는 예루살렘의 두 지도자인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난 후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을 선교하였고, 안티오키아에서 유다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전교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의 교회를 창립하였다(사도 11, 19-20). 바오로는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지중해 동부 지역으로 광범위한 여행을 하게 되는데, 이때 안티오키 아를 거점으로 삼았으며, 예수를 섬기는 안티오키아 시민들을 처음으로‘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렀다(사도 11, 26). 
 




2. 성 바오로 사도의 전도 여행

  

   하느님의 은총으로 사도가 된 바오로는 안티오키아를 이방인 선교의 발판으로 삼아 자신을 온전히 선교열정에 투신하였다 . 바오로는 아시아 현재 터키의 일부, 시리아와 유럽, 그리스를 거쳐 로마에서 순교하기까지 지금의 요르단과 예루살렘으로 가는 모든 길 전체를 여행했다 .

   


   
1) 제1차 선교여행

    

   키프로스에서 그리고 남쪽에서는 안티오키아로부터 아나톨리의 남쪽 (페르게, 안티오키아 , 이코니온, 리스트라와 데르베) 등을 여행하면서 바오로 사도는 같은 민족인 유다인들에게 선교를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선교의 역량을 집중하였다. 바오로 사도와 바르나바는 여러 곳에 공동체를 건립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면서 열정적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기쁜 소식을 설교하며 선교하였다. 1차 선교 여행을 끝내고 바오로는 바르나바와 교회역사상 첫 공의회인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하였다(사도 15, 1 -21).


  

   ▲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제1차 선교 여행


    

    2) 제2차 선교여행

    

   바오로의 2 차 선교 여행의 가장 큰 특징은 바오로가 유럽에 첫 발을 디뎠다는 것이다. 실라스와 티모테오와 함께 한 두 번째 여행은 그리스 트로아스에서 다다넬스 해류까지, 그리고 필리피, 테살로니카, 베로이아, 아테네와 코린토까지 유럽지역을 광범위 하게 선교하였다. 특히 필리피 공동체는 바오로에게 선교와 생계를 적극적으로 돕는 역할을 한다 . 필리피에서는 감옥에 갇혔다 풀려나기도 하였고, 코린토에서는 고발까지 당하면서 선교의 열정을 불태우고 그의 선교 거점인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 바오로의 제2차 선교 여행

  


    
3) 제3차 선교여행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와 티토와 함께 아나톨리와 그리스에서 만든 교회들을 다시 방문했다 . 이 3차 선교 여행의 중심은 27개월 동안 머문 에페소 공동체였다. 이곳에서 많은 위험을 경험했고, 고통 속에서 감옥에 갇혀 있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 에페소 공동체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신앙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세 번째 선교 여행은 바오로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끝나게 된다 .


   

   ▲ 바오로의 제 3 차 선교 여행  

  


    
4) 로마 여행

   

   세 번째 선교 여행을 마칠 즈음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바오로는 유다인과 로마 총독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로마로 호송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가택연금을 당하면서도 집을 찾아방문하는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으며, 복음전파자로서의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네로 황제 치하에서 67년 경 로마 대화재 사건 중 참수하여 순교하였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행은 언제나 고난과 위험, 생명의 위협까지 늘 동반되었으나, 바오로 사도는 그때마다 선교의 열정과 지혜로서 벗어났으며, 항상‘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며, 우리의 주님이시다’라는 기쁜 소식을 힘차게 전하였다. 또한 예루살렘 사도회의를 통해 이방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을 위한 해결책을 모색하기도 했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행으로 그리스도교가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준비되었던 것이다.
 
   

   ▲ 미결수가 되어 로마로 호송된 바오로의 여정

  


    
5) 바오로 사도의 생애 연대표



  


 

3. 바오로 서간의 신학적 조명

  

   1) 바오로 서간

   

   바오로 서간은 신약성경의 21권 서간 중에 절반이 넘는 13권이라고 이해한다. 이를 라틴어로는 ‘코르푸스 파울리눔 (Corpus Paulinum)’으로 칭하는데 우리말로 굳이 옮기자면 ‘바오로 서간집’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바오로 서간 13권 모두의 경우에는 바오로가 언제나 자신을 저자라고 밝힌다. 곧 ‘나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나 그와 비슷한 말로 시작된다. 그러나 학자들은 바오로 서간 13권 가운데 7권 만을 바오로의 친서라고 본다. 이‘바오로 친서’에는 로마서, 코린토1·2서, 갈라티아서, 테살로니카 1서, 필리피서, 필레몬서 등이 있다. 나머지 에페소서, 콜로새서, 테살로니카 2서, 티모테오 1·2서, 티토서 등 6권은 후대에 제자들에 의해 보태어지거나 편집되었다고 보아, ‘후기 바오로 서간’ 또는 ‘바오로 후기 문헌’등으로 분류된다. 나아가 옥에 갇혔을 때에 집필한 에페소서, 콜로새서, 필리피서, 필레몬서 등 네 권은 ‘옥중서간’ 또는 ‘수인서간’이라 부르며, 티모테오 1·2서와 티토서 등 세 권은 티모테오, 티토 등 사목자들을 대상으로 집필했기에 ‘사목 서간’이라 한다.

    

     

   2) 성 바오로 사도의 신학 사상


 

   바오로는 초대 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신조 등의 그리스도 전승을 중심으로 자신의 사상을 펼쳤다. 그가 집필한 서간들은 대부분 특정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사목적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신학적으로 연관하여 나타내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바오로의 사상들은 신학적인 이해보다는 신앙의 실천적인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바오로 사상의 핵심은‘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구원>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1장 16절 이하의 문장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무엇을 체험하였는가를 종합하고 있다. 즉, 복음은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놀라운 효과를 나타내고 있으며, 능력과 성령과 굳은 확신 안에서 전해진다(1테살1,5). 이 소식을 받아들인 사람은 장차 닥쳐올 하느님의 진노를 면할 수 있고, 구원을 체험한다. 복음 선포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 가득한 사랑이 인간들에게 선사되며, 궁극적인 구원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미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으나(로마 8,24), 그 구원을 위해 중요한 것은 자기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행위이다.


 

   <하느님의 의로움>

   바오로의 사상 중에 가장 중요한 표현들 중의 하나인 ‘하느님의 의로움’은 구약성경의 전반적인 사상에 근거하여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품성인 ‘하느님의 자비’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특히 그분의 대속적 죽음으로 드러났고, 사도들의 복음 선포로 선민과 만민에게 알려졌으며, 인간은 복음 선포를 받아들이는 믿음으로써 그 은혜를 받는다. ‘의롭게 되다’라는 뜻은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고 인간은 그 자비를 입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그 속에 하느님의 심판하심이 함께 들어있다는 것이다(갈라 3,6; 로마 4,5 등). 또한 바오로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의로움’은 하나의 구원개념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의롭다’라는 말은 사람들의 불충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자신과 자신의 약속에 충실하며, 예수님을 통해 구원해 주는 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은 인간이 자신 앞에 설 수 있도록 돌보시며,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용기를 주시는 것이다.


 

   <속량>

   바오로는 구원행위를 자주 속량으로 표현하였다. 구약에서 하느님은 이집트 종살이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킴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았고,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신약의 예수님에게 예속된다(탈출 6,6; 이사 43,1 참조). 이러한 구속행위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소유가 되며, 이 부분에서 구약의 체험과 연결된다. 하느님이 구약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기 위하여 이집트로부터 해방시켰듯이, 하느님은 자신의 사랑 외에는 다른 어떤 이유로도 절대 인간들을 당신 자녀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이 속량개념에서 표현되고 있다.


 

   <새로운 창조>

   그리스도의 구원행위의 특징을 드러내기 위해 바오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체험과 연관시킬 뿐만 아니라, 창조에 대한 민족의 지식과도 연결시키고 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아담에 의해 세상에 나타난 인간의 숙명이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로마 8,19) 은총으로 극복되었다. 결국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통하여 인간은 쇄신되며, ‘새로운 창조’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런 쇄신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자유>

   바오로에게 있어서 자유의 개념은 하느님의 의로움과 관련되어 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화된 인간의 특징으로서 ‘율법과 죄로부터의 자유’를 제시한다. ‘율법’이라는 단어 안에서 인간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일련의 경험과 숙고들을 종합하고 있다. 즉, 율법은 하느님으로부터 왔고 그래서 좋은 것이라 해도, 그것이 어떤 외적인 것으로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한 올바로 채워질 수 없다. 따라서 하느님의 의로움을 받아 의롭게 된 사람은 죄와 율법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자유는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때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며, 이 자유를 바오로는 ‘영광’이라고 칭하였다(필리 1,12-26; 2코린 5,1~10)


 

   <인간의로서의 믿음>

   바오로는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제안에 대하여 인간에게 요청되는 응답을 ‘믿음’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 믿음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서 인간이 자신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공로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은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응답인 믿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서 활동하는 것으로서, 믿음을 갖고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이웃사랑 안에서 생명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사랑을 통해서 활동한다(갈라 5,6).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예수 사건’을 풀이하면서 ‘하느님은 사랑의 원천’이라고 하였다(로마 5,8). 예수님은 그 사랑을 완성(갈라 2,20)하였고, 하느님은 그 사랑의 영원성을 예수님의 부활 사건으로 드러내셨다. 또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새로운 아담’으로 이해하였고,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으며,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 깨어 있으라고 함으로써 긴박감을 드러내고 있으나, 재림이 지연됨에 따라 기쁨과 희망으로 기다려야 하는 생활의 변화와 굳건한 믿음에 대해 강조하는 변화를 보이기도 한다. 결국 바오로 사도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말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십자가를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하느님께로 온전히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 바오로의 신학 사상이다.


 


 

   3) 바오로 서간 요약



 


 

4. 성 바오로 사도와 초대교회 공동체

  

    터키주교회의 서한중에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지닌 증거자요, 사도인 바오로.

   


   오늘날 이방인의 위대한 사도로 기억하는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사도 21,39)인 이 유다인은 누구입니까? 그는 7-10년 경 타르수스에서 탄생하여 이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보내졌고 가말리엘 학교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사도 22,3) 교육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율법과 유다 전통에 충실했던 그는 가장 먼저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박해하였습니다(갈라 1,13-14). 루카 복음 사가는 바오로는 유다교 출신인 그리스도교인을 찾아서 감옥에 보낸 열혈당원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사도 9,1-3). 또한 바오로가 스테파노를 죽이는데 동조했던 사람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루카 복음사가에게서 전해 듣고 있습니다(사도 8,1). 그러한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초기 공동체에 대한 그의 적개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에서 하나의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의 적대자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리스도는 번개와 같은 섬광으로 율법에 광적인 이 열혈주의자의 삶 안에 들어오고 그를 복음의 사도로 변화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했던 충직성과 완전한 투신을 지닌 율법 준수자가 이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데 그리스도는 바오로를 눈멀게 함으로써 그에게 현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다시 보여줍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기합니다: “그는 악을 보아왔으므로 하느님은 그를 선으로 이끌 목적으로 눈멀게 하고…그러나 그를 눈멀게 한 것은 어두움이 아니라 너무나 밝은 빛 때문이었다”(Panegirico IV su Paolo 2).

  

   다마스쿠스에서 바오로는 엄격한 율법의 준수가 완전한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이 없는 율법은 죽은 육체와 같은데, 이 율법의 이름아래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이들을 박해하고 죽이는데 까지 동조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며 계명을 오로지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이러한 율법적 경향 앞에서는 항상 하느님이 하나의 우상으로 변형되어 버리고 그분과의 관계를 사랑의 마음이 없는 계약으로 탈바꿈 시켜 버리는데 다마스쿠스를 체험한 바오로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거듭 말합니다: 당신 구원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이십니다”(로마 10,4). 오로지 인간적인 노력으로만 자체로 거룩해지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다마스쿠스이후 바오로의 삶은 완전한 방향의 변화를 알게 해줍니다. 다마스쿠스에서 그리스도인 하나니아스(사도 9,10 참조)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믿게 되었고 “보고 들은 것”(사도 22,15)을 설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로 사도들(“와서 보시오”)과 의심 많은 토마가 증언했던 것처럼(“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요한 20,27), 바오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체험으로 신앙의 증거자가 됩니다. 같은 신앙을 지닌 이들의 적대감이 커지자 아라비아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갈라 1,17). 다마스쿠스로 돌아온 바오로는 정치 지도자들과 그곳에 거주하는 유다인으로부터 적대감을 받게 되었는데 열렬한 율법주의자에서 그리스도교 선교사로 변화한 데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삶은 끊임없이 위협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몇몇 동료는 사방으로 성문이 지켜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를 바구니에 실어 성 밖으로 내려 보내게 됩니다(사도 9,23-25).

  

   이 시기에 바오로는 사도들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으나-루카 복음사가가 언급했듯이-“모두 그를 두려워하였고 그가 제자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사도 9,26). 그를 사도들에게 그리고 공동체에 소개하고 그들에게 다마스쿠스의 체험에 대해서 그들에게 말을 한 사람은 바르나바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잠시 머물면서 바오로는 주님을 전하였지만 몇몇 유다인이 죽이려하였기 때문에 타르수스로 피신시켜야만 했습니다(사도 9,30).

  

   그가 태어난 도시에 머무른 지 약 사 년 정도 되었을 때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에 복음을 전하는데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를 찾아 왔습니다(사도 11,25). 처음부터 바오로는 안티오키아 공동체에서 교회 구성원이 되게 됩니다. 사실 이곳에서 그는 첫 번째로 바르나바와 함께 선교를 시작하고(사도 13,2-3), 다시 되돌아 온 곳이며 (사도 14,26-28), 두 번째 선교여행도 (사도 15,36-40. 18,18-22) 이곳에서 시작하였고, 세 번째 선교여행도 이곳에서 시작하게 됩니다(사도 18,23).

    

   안티오키아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던 반면 몇몇 팔레스티나에서 온 유다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할례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것을 따르는 결정은 “예루살렘 사도회의”(AD 49년경)라 일컬어지는 데서 기원하였는데 여기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이방인에서 개종한 이들은 모세의 율법에서 면제된다고 선포하였습니다(사도 15,5-29). 이러한 결정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유다교의 성격을 띤 보다 완전한 형태를 취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하나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결정으로 바오로는 단호하게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안티오키아에서 베드로와 반대로 맞선 것은 타협이나 후퇴로부터 새로운 그리스도교 정체성을 보호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갈라2,11-14).


 

   바오로를 우리가 사는 터키 지역에서 그리스까지 계속해서 횡단하게 했던 여행은 사도행전에서 루카 복음사가가 기록한 것이고 우리 각자는 손에 이 사도행전을 다시 들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변함없는 열정을 묵상함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Yavac인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와 에페소(Selcuk)에 한정하여 바오로의 현존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사십칠년경에 바오로는 페르게에서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도착하였습니다(사도 13,14-52). 그 지역의 회당에서 바오로는 구약성서에서 세례자 요한까지 이르는 구원역사의 중요한 단계들을 경험하게 되었고 하느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신 예수를 선포하는데 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구원의 역사는 바로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주님 안에서 바오로는 메시아가 약속한 모든 것들이 실현되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 안에 계신 분은 유일하신 한 아드님입니다.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여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계시인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사랑의 구원계획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언제나 그리고 모든 이를 위해 존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에게서 이루어진 이러한 선포는 그를 받아들이기 위한 몇몇 준비들과 그를 안티오키아로 피신해야만 하게 했던 다른 반대적 측면들에서 발견됩니다(사도 13,50-52).

   

   바오로의 선교여행에 중요한 다른 여정은 에페소였는데, 여기에서 바오로는 삼 년 정도(54-57년경) 머물면서, 유다인이나 지역의 이방인의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복음화의 광범위하고도 힘든 사업을 전개해 나갔습니다. 이 시기 동안에 수많은 고통을 암시해주는 것이 있는데 “에페소에서 맹수와 싸웠다는 것”(1코린 15,32)을 그 스스로가 회고한 것입니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2코린 1,8-9)에서 “우리가 아시아에서 겪은 환난을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너무나 힘겹게 짓눌린 나머지 살아날 가망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사형 선고를 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죽은 이들을 일으키시는 하느님을 신뢰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아마도 에페소에서 몸소 겪었던 감옥에 대해서 암시하고 있습니다(로마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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