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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바오로의 해

성 바오로 대성당 외부

성 바오로 대성당(San Paolo fuori le Mura)
 
사도 성 바오로 기념성당은 당시 교황이었던 성 실베스테르 1세(Silvester I)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제의하여 건립되었다.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념 대성당을 세우고 축성하던 날인 324년 11월 18일, 로마 성문 밖에 있던 사도 바오로의 무덤 위에도 콘스탄티누스 기념 대성당보다 규모는 작지만 기념성당을 지어 같은 날 동시에 교황의 축성을 받았다. 그 후 395년 호노리우스 황제가 그 자리에 다시 대성당을 세웠다.
 
그러나 성 바오로 대성당은 1823년 7월 15일 대화재로 말미암아 대성당 건물은 물론 내부에 그려져 있던 벽화를 비롯하여 모자이크 등 역사적인 보물은 거의 다 소실되거나 파괴되었다. 비오 7세(Pius VII)의 후임 교황인 레오 12세(Leo XII)는 즉위하자마자 곧 성 바오로 대성당의 재건을 위해 전 세계 교회에 특별요청을 하였다.
 
그 결과 대성당 정면 외벽은 거대한 기둥과 황금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 황금 모자이크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위에는 베드로(좌)와 바오로(우)의 호위를 받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가운데는 네 줄기 강물이 열두 지파와 사도를 상징하는 12마리의 양들에게 흘러가서 목을 축이는 장면이, 맨 아래에는 4명의 예언자 모습이 모자이크되어 있다. 그리고 회랑 정원 중앙에는 칼을 든 바오로 사도상이 세워져 있다. 한 손에는 성경, 다른 한 손에는 칼을 쥐고 있는데, 이는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전하다가 참수 당했다는 의미이다. 정문 입구 양 옆에는 기둥을 파서 만든 벽감이 있고, 그레고리오 차팔라가 제작한 베드로와 바오로 상이 세워져 있다. 1931년에는 안토니오 마라이니가 조각한 청동문이 세워졌으며, 그 문에는 베드로와 바오로의 생애에 대한 내용이 부조되어 있다.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좌우로 네 줄의 대리석 기둥들이 있는데, 한 줄에 스무 개의 기둥들이 있어서 총 80개의 기둥들을 볼 수 있다. 바오로 사도의 무덤 위에 세워진 교황제대 위의 천개 장식은 13세기의 거장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가 제작한 고딕식의 작품이다. 그 위에 19세기 대화재 때에도 손상되지 않은 승리의 아치는 5세기에 고트족의 황후 갈라 플라치디아(Galla Placidia)가 기증한 것이다. 천장은 회벽과 화려한 대리석 장식으로 꾸며졌으며 모든 기둥 위에는 사도 베드로부터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이르는 교황의 초상이 있다.
 
1854년 12월 10일 비오 9세 교황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교리를 선포한 지 이틀 후에 축성한 성 바오로 대성당은 길이 132m로 로마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 다음으로 규모가 크며, 성 베드로 대성당, 라테라노 대성당, 성모 마리아(성모 설지전) 대성당과 더불어 로마 4대 대성당 가운데 하나이자 전 세계 10대 대성당 중의 하나이다.
 
 
[성지를 찾아서] 로마 성 바울로 대성당
 
로마는 각광받는 성지 순례코스이다. 교황님이 계시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있고, 연인들로 넘쳐나는 트레비 분수, 그리스도인의 피로 물들여진 콜로세움도 있다. 다 의미를 지닌 곳이지만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삶, 달라진 인생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로마 성 밖 ‘성 바울로 대성당’과 ‘바울로 사도의 참수지’를 꼼꼼하게 돌아볼 것을 권하고 싶다. 박해시절 속칭 ‘예수쟁이’들을 잡아들이던 가해자에서 예수님을 체험하고 난 뒤, 삶의 자세를 확 바꾸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사도 바울로. “온유하고, 오래 참고, 시기하지 않는 게 사랑”이라고 설파한 바울로는 세 차례 전도 여행을 통해 중동에 머물던 기독교를 지중해 연안 유럽까지 확산시켰으나 끝내 참수형을 당했다. 네로 황제의 명을 받은 로마 군인들에 의해 참수당한 바울로 사도의 목은 세 번 튀어올랐다. 세 번 튀어오른 그 자리마다 경당이 들어서있고, 목이 잘린 바울로의 시신을 묻은 무덤 위에 세워진 교회가 바로 성 밖 성 바울로 대성당이다. 말하기보다 글쓰기를 더 좋아했던 바울로 사도가 죽음을 향해 마지막으로 걷던 그 길 끝에 자리한 참수지를 걷다 보면 어디선가 사도의 외침이 들려온다. “돌아서라! 돌아서서 새 사람이 되어라!”

다마스커스에서 돌아서다
 
바울로는 원래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유다인 사울이었다.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던 사울은 앞장서서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그날도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시리아 다마스커스로 향하고 있었다. 말을 타고 가던 사울이 갑자기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을 듣고 동시에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비추는 빛을 받았다. 땅으로 떨어지며 실명하게 된 사울은 “뉘시오니까?”라고 물었다. 빛은 대답하였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다.”
 
하느님의 음성과 빛을 쐰 이후 투사 ‘사울’은 작고 겸손한 ‘바울로’로 바뀌었다. ‘다마스커스의 체험’으로 예수야말로 하느님의 아들임을 깨달은 바울로는 예수 사냥꾼에서 사랑의 사도로 바뀌었다. 개심한 바울로는 지중해 전역으로 세 차례 전도 여행을 다녔다. 전도의 거점은 안티오키아(=안디옥)이었고, 안티오키아 사람들이 예수를 신봉하는 교도들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매를 맞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던 바울로는 로마에서 네로에 의해 순교의 칼을 맞았다. 당시 네로는 로마 시가에 불을 지르고, 여론이 사나워지자 다급한 나머지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박해하였는데 이때 잡힌 바울로는 로마 남문 밖 뜨레폰타나에서 참수당하였다.
 
참수당한 목이 세 번 튀어오르다
 
사위가 어둠에 잠기는 시각, 바울로 사도의 순교지 뜨레폰타나를 찾아갔다. 일몰에 맞춰 문을 닫는 이곳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섰다. 바울로 사도의 참수지에 들어서니 오른쪽 구석에 어른 키 절반 쯤 되는 돌이 서 있다. 바로 사도 바울로가 참수당한 돌이다. 이 돌에 눕혀졌던 바울로 사도의 목은 참수당한 뒤, 세 번이나 땅에 떨어졌다가 다시 솟구쳐 올랐다. 사도의 목이 튀어오른 곳마다 물이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사도의 넋이 떨어진 자리마다 우리의 영혼을 씻어주려는 듯이 샘이 솟아올랐다고 해서 ‘세 분수’를 뜻하는 뜨레폰타나라고 부른다. 바울로 사도의 머리가 튀어오른 곳은 제단으로 바뀌었다. 불이 켜져 있는 첫 제단에서 14걸음 옆에 두 번째 제단, 그 14걸음 옆에 세 번째 제단이 있다. 부활절을 앞둔 성 금요일이 되면 교황은 이곳에서 십자가의 길 14처를 시작한다. 이방인의 사도 바울로, 사랑의 사도 바울로가 죽음을 향해 걸어갔던 마지막 10m 길과 참수지를 돌아보고 어둠 속에 젖어드는데 어디선가 사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서로 사랑하라! 사랑이 없으면 천사의 소리도 울리는 징에 불과할 뿐이니!” 고린토인, 에페소인, 갈라디아인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수많은 마음의 편지를 보내는 바울로 사도가 없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더 각박했을까?
 
바울로의 묘지 위에 성전이 들어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는다고 가르친 바울로 사도는 64년 혹은 67년에 참수당해 오스티엔세 길가에 묻혔다. 바울로 사도가 묻힌 곳에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성녀 헬레나의 아들)가 성전을 세웠다. 바로 4세기에 세워진 성 밖 바울로 대성전이다. 교황님이 계시는 베드로 대성전이 건립되기 전까지 가장 크고 아름답던 성 바울로 대성당은 19세기 초반 화재로 거의 전부 소실되어 버렸다. 현재 성당은 1854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새로 축성되었고, 전면 모자이크화는 일품이다. 성 바울로 대성전 정원에는 바울로 사도의 하얀 석상이 서 있다. 참수당한 바울로 사도의 순교와 성경 말씀은 검과 같다고 한 것을 나타내듯 오른손에는 칼, 왼손에는 성경을 들고 있다. 성당 내부는 화려한 다른 성당과 비교하여 무척 단조롭다. 마치 회심한 이후 바울로 사도가 평생 검소하게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 전심하였음을 나타내 주듯이. 신약 27권 가운데 서간으로 된 고린토, 데살로니카, 골로사이서, 로마서 등 13권을 쓴 바울로 사도의 무덤은 중앙 제대 아래에 보관되어 있다. [매일신문, 2007년 4월 26일, 글 사진·로마에서 최미화 기자]
 
 
로마 교회([영] Roman Church)
 
일반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 혹은 간단히 로마 교회라고 불리는 교회는 로마 교황을 으뜸으로 하는 전세계 교회를 일컫는 말로 시대에 따라 그 의미를 조금씩 달리해 왔다.
 
먼저 로마 교회라는 말은 로마 주교의 관할 아래 있는 지역교회라는 의미를 가진다. 로마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57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57~58년경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로마에는 그리스도교가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으로 보아 바오로 이전에 로마에 그리스도교를 전도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사도들의 우두머리인 베드로이다. 이러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입증하는 문서는 <클레멘스의 제1서한>인데, 이 서한은 주교명단의 첫머리에 베드로의 이름을 적고 있다. 이때의 로마 교회란 ‘베드로에 의해 창설된 교회’ 혹은 ‘로마의 교회’라는 한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로마 교회라는 말은 또 ‘동방교회에 대립되는 서방교회’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로마에 뿌리박은 그리스도교는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관용령 이후 급격한 발전을 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이단들이 속출하는 현상도 빚게 된다. 이때부터 로마 교회는 로마지방의 교회라는 의미와 함께 이단에 대한 정통교회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특히 동서로마제국의 분열 후 격화된 교의논쟁으로 그리스도교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분열되는데, 이때의 로마 교회라는 말은 동방교회에 대립된 교회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다.
 
마지막으로 로마 교회라는 말은 종교개혁 이후 분리된 프로테스탄트에 대해 보편적인 교회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로마 교회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즉 로마 교회는 ① 그리스도, 교황, 주교, 사제로 이어지는 가시적 제도(可視的制度)로서의 교회다. ② 칠성사의 집행으로 생명을 얻고 유지하는 교회다. ③ 미사를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하는 교회다. ④ 성경과 성전에 동일한 권위를 부여하는 교회다. ⑤ 성지 순례와 수도생활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교회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일각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이를 로마교황청 중심의 작은 교파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들은 로마 교회를 로마교(Romanism)라고 경시하면서 가톨릭 신자들을 로마 교도(Romanists), 혹은 교황 추종자(Papists)라고 비난 섞인 어조로 부르기도 하였다.
 

보편적 교회로서 로마 교회는 교황청 아래 세계의 여러 교구를 둔 중앙집권적 조직을 갖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교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천주교회, 가톨릭 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며 로마 교회라는 말은 별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한국가톨릭대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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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시내와 사도 바오로의 순교지인 트레 폰타네(Tre Fontane) 사이에 위치한 성 바오로 대성당의 외부 모습입니다. 2006년 5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자료 출처 : 굿뉴스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