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시대에 이코니움(Iconium)이라고 불리던 코니아에 있는 성 바오로 성당 외부 모습입니다. 2007년 4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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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니온에서 선교하다(사도 14,1-7)
1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코니온에서도 전과 마찬가지로 유다인들의 회당에 들어가 설교하였다. 그리하여 수많은 유다인과 그리스인이 믿게 되었다. 2그러나 믿기를 거부한 유다인들은 다른 민족 사람들을 자극하여 형제들에게 나쁜 감정을 품게 만들었다. 3그래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곳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주님을 의지하며 담대히 설교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통하여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시어, 당신 은총에 관한 그들의 말을 확인해 주셨다. 4그리하여 그 도시 사람들이 둘로 갈라져, 한쪽은 유다인들의 편을 들고 다른 쪽은 사도들의 편을 들었다. 5그런데 다른 민족 사람들과 유다인들이 저희 지도자들과 더불어 사도들을 괴롭히고 또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하였다. 6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일을 알아채고 리카오니아 지방의 도시 리스트라와 데르베와 그 근방으로 피해 갔다. 7그들은 거기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다.
코니아(Konya)
신약성경의 이코니온인 오늘날의 코니아는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에서 약 250km, 카파도키아에서 226km, 신약성경의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인 얄바츠(Yalvac)에서 180km 떨어져 있다. 코니아는 아나톨리아의 예술과 정치, 학문과 문화에 관한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도시이며, 이슬람교의 신비주의 종파인 메블라나 신비주의의 발상지로 잘 알려져 있다.
기원전 334-333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점령되었고,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 사망 후 그의 부하 리시마쿠스 장군이 차지했다. 그 후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정권에 이어 페르가몬 왕국이 차지했다가 기원전 133년 페르가몬 왕 앗탈로스 3세가 임종에 이르러 왕국을 로마 공화국에 진상할 때 이코니온도 함께 넘어갔다. 11세기 셀주크 투르크인들이 코니아를 수도로 셀주크 제국을 세우면서 코니아는 황금기를 누리게 되었다. 사방에서 예술가와 건축가, 이슬람 관련 학자들이 몰려왔고 13세기 메블라나 신비주의 종파를 만든 루미(Mevlana Celaleddin Rumi) 역시 이 전성기 때의 학자 중 한 명이었다. 이들은 빙글빙글 춤을 추다가 비몽사몽간에 알라를 느낀다고 한다. 현재 코니아에 남아 있는 대부분의 유적들은 셀주크 제국과 메블라나 신비주의와 관련된 것들이다.
사도 바오로는 제1차 전도여행 때(45-49년경)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어 이코니온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전도했다(사도 14,1-7). 코니아 시내에 있는 성 바오로 성당은 1910년에 세워졌으며 현재 예수의 작은 자매회 수녀님 두 분이 세계 각지에서 오는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코니아 전체에 가톨릭 신자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성경속의 터키
오늘날 터키는 이슬람 국가이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리스도교와 매우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발견되었다고 전해지는 아라랏 산이 터키 동부에 있고, 그리스도교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고향인 하란이 터키 농업과 수력발전의 중심지인 우르파 남부에 위치한다. 우르파에는 아타튀르크 댐이 있는데 만수가 되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댐이라고 한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부르게 된 도시가 바로 사도 바오로의 전도여행의 출발점이 된 안티오키아로 시리아와의 접경에서 지중해 쪽에 있으며 오늘날에는 안타키아(Antakya)라고 불린다. 안타키아 동쪽 언덕에 1198년 십자군에 의해 건설된 동굴성당인 성 베드로 성당이 있다. 이곳에서 지중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오면 멜신이라는 절경의 휴양도시가 있고, 사도 바오로의 출생지인 타르수스(Tarsus)가 바로 그 부근이다. 신약성경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터키 서쪽 에게 해안의 이즈미르(Izmir)라는 도시 부근에 위치해 있으며, 한때 그리스도교의 요람이었음을 보여주지만 지금은 이슬람 지역으로 변했다.
터키의 역사
터키는 자연과 문명이 조화를 이루고 동서양이 공존하며 그리스 로마시대의 문화유적과 이슬람 문화가 한데 모여 있는 이른바 ‘퓨전’ 국가이다.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6,500년경에 차탈허유크 최초의 부락이 형성된 이후 핫티, 히타이트, 프리기아, 이오니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비잔틴, 셀주크, 오스만 그리고 1922년 술탄 제도를 폐지한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터키의 역사는 마치 인류 문명의 견본시(見本市)와 같다.
1. 아나톨리아
소아시아 : 면적 약 78만 5760㎢, 동서길이 약 1,000km, 남북길이 400~600km. 아나톨리아(Anatolia)라고도 한다. 터키어로는 아나돌루라고 하는데, 어원은 그리스어 ‘아나톨레(anatole)’이며 태양이 떠오르는 곳 또는 동방의 땅을 의미한다.
터키 영토의 97%가 아시아 지역이며, 동쪽 및 남쪽으로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과 접한다. 북쪽 흑해 연안에는 폰투스 산맥, 남쪽 지중해 연안에는 토루스 산맥이 동서로 뻗어있고, 그 사이에 평균 해발고도 800m인 아나톨리아 고원이 내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동부에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등 두 강의 수원과 아라라트 산(5,185m)이 있다. 중앙부의 고원지대는 스텝 또는 사막성 기후이며, 여름이 짧고 겨울은 몹시 춥다. 흑해 연안은 기온 변화가 적으며, 연간 비가 잦다. 지중해와 에게해 연안은 지중해성 기후이며, 생활하기에 가장 알맞다.
이 지방은 동방과 서방을 연결하는 민족이동의 통로이자 식민활동의 무대였으며 예로부터 갖가지 문명이 꽃핀 지역이었다. 기원전 1680년대에는 이 반도의 고원지대를 중심으로 히타이트 왕국이 일어났으나, 기원전 1200년대에 쇠퇴하자 그 대신 프리지아 왕국이 일어났으며 기원전 700년대에는 리디아, 카리아 등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546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이 침입한 후로는, 연안의 그리스 식민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반도 전체가 그 지배에 들어갔다. 그 후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가 침입하자 헬레니즘 세계에 편입되었으며, 그가 죽은 뒤에는 후계자인 셀레우코스 왕국에 소속되었다가 폰투스, 페르가몬 등의 작은 독립국이 각지에 자립하였다.
기원전 133년 로마의 동방주(東方州)가 되었고, 이어 동로마, 비잔틴 제국의 영토가 되어 고전(古典) 그리스도교 지역을 구성하였다. 한때 사산왕조 이란이 침입하였으며, 이슬람 세력이 커짐에 따라 큰 압력을 받았다. 그러다가 1071년 셀주크 투르크 제국이 침공하자 이것이 그리스 ․ 로마 세계로부터 터키 이슬람 세계로 바뀌는 전기가 되었다.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 1세(1081~1118)는 로마로 절박한 도움을 호소했고, 이에 1095년 피아첸차와 클레르몽의 교회회의에서,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십자군 운동을 호소하여 여섯 차례 십자군 원정(① 1096~1099년 ② 1147~1149 ③ 1182~1192년 ④ 1202~1204년 ⑤ 1228~1229년 ⑥ 1248~1254)이 이루어졌다.
1300년대 말 오스만 투르크가 성립하자 그 제국 세력에 들어갔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 터키를 구성하는 주요지역이 되었다. 주요산물은 밀 ․ 보리 ․ 포도 ․ 과일 ․ 잎담배 등이며, 석탄 ․ 크롬 ․ 철광석 ․ 구리 ․ 망간 등 광물자원도 풍부하다. 주요도시는 앙카라 ․ 이즈미르 ․ 아다나 ․ 부르사 등이다.
2. 오스만(Ottoman) 제국
시조 오스만이 13세기 말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건설한 터키계 이슬람국가(1399~1922년). 판도가 가장 컸을 때는 아시아 ․ 아프리카 ․ 유럽 3대륙에 걸쳐 있었다. 1326년 동로마 제국의 세력을 소아시아 반도에서 축출하고, 1362년 발칸(Balkan) 반도에 상륙하여 아드리아노플(Adrianople)을 함락하여 수도로 삼았다. 1396년 헝가리 왕을 중심으로 한 터키 십자군과 싸워 대승, 발칸 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했고,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여 수도를 이곳으로 옮겼다.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 : 슐레이만 1세(1520~1566년 재위) 때에 전성기에 달하였다. 크리미아 칸국(汗國)을 보호국화 하고 흑해의 해상권을 독점하여 경제력을 강화하였으며, 중앙유럽을 원정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1529년, 헝가리 ․ 보스니아 이동(以東)의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고, 1538년 프레베자(Preveza)의 대 해전에서 베네치아 ․ 스페인 ․ 로마 교황의 연합함대에 대승하여 흑해와 더불어 지중해의 제해권을 획득, 북아프리카 연안 일대를 세력 범위에 넣었다. 그러나 1571년 레판토(Lepanto) 해전에서 스페인 ․ 베네치아의 연합함대에 대패하여 서방 진출을 저지당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3대륙에 걸친 대제국이 되어 동서 교통로를 지배하고, 거기를 통과하는 상품에 중세(重稅)를 과하여 거대한 이익을 독점하고 번영을 누렸다. 이것은 유럽인의 아시아에의 신항로 개척과 지리상의 발견을 촉진한 주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3. 비잔틴 제국
동(東)로마제국이라고도 한다. 고대 로마제국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결과 서방의 판도를 잃었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인 비잔티온에 제2의 로마 수도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330년 5월 11일 개도식(開都式)에서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한 제국은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의 점령 때까지 존속하였다. 이처럼 천여 년 간 지속된 이 제국을 후대(後代)에 비잔티온 이름에서 비잔틴 제국이라 하였다.
정치적으로 로마의 이념 ․ 제도를 이어받고, 종교적으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았으며,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을 기조로 한 중세의 로마제국은 북쪽으로부터 잇따라 침입한 스텝지역 유목민족, 동방의 위협적 존재인 사산왕조 페르시아인 및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 투르크인에 대해 그리스도교 세계의 동쪽 관문을 지켜, 동유럽 제국(諸國)의 역사적 초기에 그리스도교 포교를 통하여 그 문화적 기초를 준비하여, 재건이 막 시작된 동시대의 서유럽에 정치적 ․ 문화적 교섭을 통하여 계속 영향을 끼쳤다.
이리하여 그리스 정교권(正敎圈)이 형성되어 비잔틴 제국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이반 3세의 ‘제3의 로마 ․ 모스크바’의 이념으로 계승되었다. 또, 이 제국에서 보존된 그리스어의 지식은 문예부흥기의 서유럽인에 의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석재 신부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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