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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해설(2) - 품어라 아주 품어라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 해설(2)


품어라 아주 품어라


우리는 예수의 시선에서 성삼위의 사랑을 경험한다. 예수 행적의 징표들은, 특히 가난한 자, 병자, 고통 받는 자들과 죄인들과 함께 자비를 가르친다. 예수는 모든 것을 자비로 말하고, 모든 연민을 피하지 않는다.(마태 9,36)(8항) 예수는 연민과 자비로 잘못을 용서하며, 누구도 -잃은 양, 잃은 은전, 돌아온 아들- 포기하지 않는 아버지의 자비를 하느님의 본질로 계시한다.(루카 15,1-32) 예수는 자비가 아버지의 행동만이 아니라 어린 자녀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표준이 된다고 단언한다.(마태 5,7) 성경전체가 가리키는 핵심어, 자비는 우리를 향해 움직이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제한이 없고 가시적이고 명백한 사랑은 추상 개념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일상의 태도와 생활습관으로 아버지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다. 아버지가 자비로운 것처럼 우리도 자비롭도록 부르심을받았다.(9항)

하느님은 본디 사랑이신데(1요한 4,16), 그 사랑을 사는 방법이 자비와 관련된다. 자비는 사랑의 구체적인 실현방식이다. 성경에서 자비(hesed)는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한 죄 지은 사람에 대한 용서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실행되는 것이 바로 자비다. 곧 하느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죄인에게 선물로 용서를 하시는 사랑이 바로 성경에서 나타나는 자비이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탈출 34,6-7) 구약성경에서 364번이나 나오는 자비는 히브리말 헤세드(hesed)인데 선량함에서 오는 은근한 자세, 자신에 대한 성실함과 책임을 지는 남성적 특징을 띤다. 이스라엘은 계약을 파기한 죄로 법적으로 정의를 내세워 하느님의 자비(hesed)를 요구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계약 당사자 하느님은 당신 사랑에 책임을 지므로 그 자비(hesed)를 베풀 수 있다. 이 사랑에서 오는 열매가 용서, 은총의 회복, 계약의 갱신이다.


라하밈(rahamim)은 사랑하는 자들 사이에서 품에 안기는 어머니의 사랑을 말하는 자비다. 이 자비는 권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는 사랑으로 연인 관계, 부모자식 관계, 부부 관계, 하느님과 백성 관계다. 그 생명이 저지른 잘못과 죄의 유무를 떠나 생명을 감싸 안고, 받아들이며 접촉하는 사랑이다. 이러한 자비가 잘 나타나는 성경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이다. “여인이 제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자비의 또 다른 사랑은 후스(hus) 연민이다. 불쌍히 여기고 감정적인 동정을 나타낸다. 약자에게 베푸는 사랑이다.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자비는 구체적으로 용서로 나타난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께서 해 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낫게 하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로 관을 씌워 주시는 분.”(시편 103,2-4)

 

대전주보 2015년 9월 27일(나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곽승룡 신부 / 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