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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앙과 삶을 배웁시다! (1)

‘교회와 나’ 새롭게 알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앙과 삶을 배웁시다!>

 

 

1. 새로운 시대의 태동: 공의회 전(前) 역사 

 

① 나와 상관있는 이야기

 

  말간 가을 아침 영롱한 이슬 속에 핀 노오란 국화를 보기 위해선 봄부터 소쩍새가 울어야 하고 간밤에 무 서리도 내려야 한다. 눈부신 봄날 고운 노래 부르며 하늘 높이 나는 종달새는 먼저 알을 까고 나와야 그 봄빛을 만날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천지창조 이전에도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어야 한다(창세 1,2 참조). 모든 새로운 시작은 거저 이루어지지 않는다.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안에는 인고의 시간 만이 아니라, 사람이 다 예측할 수 없고 도저히 파악 할 수도 없는 신비가 들어 있다. 고통과 인내와 신비,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시작은 이미 하도 장엄하여, 우리는 마음의 옷깃을 여며야 하리라. 이 새 시작의 매력은 단 한 번으로 끝나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계속된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의 새 희망이 있다. 우리가 이제부터 함께 나눌 이야 기는 바로 그 고통과 인내와 신비 속에 계속되는 새로운 시작 이야기이며, 그 새 시작에 함께 계시는 하느 님과 나의 이야기이며, 또 나와 너, 우리(교회)의 이야 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새로운 시대의 태동은 무엇보다 나와 상관 있고, 내가 믿는 하느님과 상관있다. 인류 역사뿐만 아니라 교회 역사에도 어김없이 명암의 면면이 있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 명암의 면면을 거쳐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이루어내는 건 그 역사 순간순간 하느님 손길이 함께하신 때문 아닐까? 여기에서 전체 교회사를 다 살 펴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새 시대 태동의 전조는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새 시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1965)는 어떻게 교회의 2000년 큰 물줄기를 바꿔 놓게 되었나?

 

우선, 교회의 가르침은 고래로 ‘이 세상과 인간은 하느님께로부터 창조되었고, 이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는데, 그것은 곧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 사랑하시어 당신 외아들을 보내셔서 그를 믿는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함’(요한 1,14; 3,16 참조) 이라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교리 는 단박에 이해될 수 있는 간단명료한 가르침은 아니다. 인류사와 교회사를 통해 늘 도전받았고 오늘날에도 예외는 아니다. 교회는 시대별로 맞닥뜨린 오류들을 단죄 하면서 그 가르침을 견지해 왔다. 그러나 현대 세계는 교회가 제시하는 일련의 답들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일련의 새로운 의문들을 던지면서 시작되었다. 이 의문의 발단은 1859년 「종의 기원」을 통해, 인간이 자연도태와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해 원숭이로부터 유래되었다는 다윈(C. Darwin)의 주장이었다. 이처럼 성경의 묘사와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과 다른 자연과학적 주장이 생겨나면서 사람들은 아주 중대한 현대적 물음을 제기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교회의 답은 인간 의 기원은 하느님 안에 있고, 인간은 하느님과 그리스도 안에 살도록 부름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 사람들은 이 가르침에 도전했고, 하느님과 종교 없이 살겠다는 세속주의가 20세기 현대사회의 한 사조가 되면 서 또 하나의 중요한 현대적 물음이 제기된다: ‘교회는 무엇을 위해서 있는가?’ 결국 이 두 물음이 제2차 바티 칸 공의회 소집의 단초가 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대전주보 / 2618호)

 

 

② 새 시대 탄생은 ‘변화’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이 두 물음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의 단초가 되었다고 지난 회에 소개했다. 그렇다면 이 물음 자체가 새로운 것이었던가? 교회가 2000년 가까이 견지해 온 가르침은 이제 이 공의 회 이후 폐기 처분된 것인가? 천만에! 전혀 그렇지 않다! 교회는 최초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325) 이후 교의로 선포한 모든 것을 오늘날까지 어김없이 지켜오고 있다. 그럼 대체 무엇이 새로워졌다는 것인가? 바로 그 교리를 이해하는 관점과 그것을 실행하는 방법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래서 새로운 것이다. ‘새롭다’는 말에는 이미 ‘변화’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일으키는 주역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다. 사실 종교는 결코 더 나은 인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외적 요구들을 통해 서 혁신되는 것이니.


이제 ‘신학’이라는 말을 꺼낼 때가 되었다. ‘신학’이라는 말에 공연히 두려워 마시길 바란다. 신학(Theology)은 하느님(Theos)과 말(Logos)의 합성어이니, 글자 그대로 하면, 하느님에 관한 말이나 담론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하느님을 믿는 이라면 너무나 당연히 저절로 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을 그냥 답습하듯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왜 그런지 그것이 내 삶과 어떻게 관련되고, 하느님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스스로 물어보고 성찰하며 하느님께로 정진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주 말씀하신 ‘깨어있는’ 것과 상관있고, 이리하여 신학은 자연히 ‘살아있는 신앙’과 연결된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과 삶 배우기’를 ‘신학하기’의 다른 말로 받아들여도 좋겠다. 실로 신학은 신앙의 진리를 간파하고 그것을 살기 위해 소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시대의 초석을 신학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맡게 된 건 결코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공의회 이전 새로운 신학으로의 일대 전환이 일어나게 되니 그것은 이러하다:

 

첫째, 고전주의적 세계관에서 역사 의식적 세계관으 로의 전환이다. 고전주의적 세계관은 과거의 진리가 미래의 모든 시대와 문화에도 확실하고 불변한다고 인식 하는 것이고, 역사 의식적 세계관은 신학적 진리의 표현은 모두 역사적 조건에 제약을 받으며, 그 진리가 표현되는 그 시대의 산물이라고 인식한다.


둘째, 신학의 연역적 방법론에서 귀납적 방법론으로의 전환이다. 연역적 방법은 성서의 (완전하신) 하느님에게서 출발하여, 신학이 탐구해야 할 일은 인간이 (하느님 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고, 귀납적 방법은 모든 강점과 약점을 지닌 인간 조건이라는 현실이 신학을 하는 요인이 되고, 인간 조건을 진리의 진정한 원천으로 고려한다.


셋째, 신학을 가르치는 방식의 ‘호교론(護敎論)적’ 접근에서 ‘토대적’ 접근으로의 전환이다. 호교론적 접근 방식은 신앙의 진리들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한 설명은 소홀히 한 채 그 진리들을 진술하고 옹호하는 데 초점 을 맞추는 것이고, 토대적 접근 방식은 단순히 신앙의 진리들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들이 삶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여 신앙의 토대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대전주보 / 2619호)

 

 

 ③ 누구를 위한 변화인가?


지난 회에 새로운 신학으로의 세 가지 대전환을 살펴 보면서, 누군가는 이미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그 세 가지 전환이 결국은 공의회 소집의 단초가 된 물음, ‘인간’ 과 ‘교회’란 무엇인가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그 물음들은 역으로 당시 사람들에게 인간과 교회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너무 추상적이어서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무엇보다 실제 삶과 관련해서 체험할 수 없는 것 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크게 보아, 교회의 가르침이 그 시대 사람들과 또 현대 사고의 조류와의 진지한 대질(對質) 없이 일방적으로 머릿속에 주입시키려 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시대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의 산물이었다고 해야겠다.

 

오늘은 공의회 전(前) 역사의 마지막으로 공의회 개최 이전의 교회와 신자들의 움직임과 분위기를 살펴보자.

 

우선, 1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이것은 독일 신학자 과르디니(R. Guardini)의 명언, “교회가 영혼들 안에서 깨어난다.”는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과르디니는, 교회는 인간의 맞은편에서 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통제하는 영적 감독기관이 아니라 신자들과 한 몸 을 이루며 인간의 삶 전체를 충만하게 하는, 한 인격체 라고 보았다. 교회는 종교적 삶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 라 오히려 그 내용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통찰에 의해 ‘우리가 교회다.’라는 의식이 점차 생기게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전까지 교회를 ‘제도’로 보아왔던 시각이 ‘인격체’로 바뀐다는 것에 있다. 곧 ‘인간 모습을 한 교회’에 비로소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이해의 토대가 된다. 이는 교회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 이후 ‘쇄신’이 라는 단어조차 금기시할 만큼 완전하고 흠 없는 교회임을 일관되게 주장해 온 사실에 비춰볼 때 실로 엄청난 변화라 할 수 있다. 곧 교회의 구조나 교회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신학의 대전환으로 새로이 깨어난 의식과 함께, 20세기 교회는 현대 세계가 던지는 의문들을 단죄하기 보다 가톨릭 신앙을 확립하는 방법으로 그에 대한 해답 찾기에 돌입한다. 그리하여 청소년 운동, 전례운동, 성서 운동, 종교교육운동, 교회일치운동 등 여러 가톨릭 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특히 이런 운동과 함께 활발히 전개된 평신도의 교회 사도직 참여는 그 자체로 살아있는 교회의 표징이요, 사람들 마음(영혼) 안에서 교회가 깨어나고 있다는 징표가 되기에 이른다.


결국 이 모든 변화는 ‘왜 그런가?’, ‘교회의 그 가르침 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되었 다고 하겠다. 교회 가르침을 내가 삶 속에서 어떻게 체험하고 실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자각은 점점 더, ‘나’와 ‘남’을 한데 아우르는, 한 공동체로서의 ‘우리’(교회)로 지평이 확장되면서, 마침내 나와 교회의 삶을 위한 변화를 창출해 내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변화는 늘 나의 깨어남에서, 내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에서 시작되고, 그 일은 혼자가 아니라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일어난다. 이 변화는 결국 교회와 나를 위한 것이니.(대전주보 / 2620호)

 

 

서명옥 로사 

대전가톨릭대학교 기초신학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