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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그리고 나/찬미받으소서

제2장. Ⅱ. 성경 이야기의 지혜 [65~75항]

Ⅱ. 성경 이야기의 지혜


65. 창조 신학 전체를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위대한 성경 이야기가 인간과 세상의 관계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물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첫 창조 이야기에 보면 하느님의 계획에는 인간의 창조도 포함됩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다음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습니다”(창세 1,31). 성경은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창세 1,26 참조). 이는 모든 인간이 저마다 헤아릴 수 없는 존엄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단순히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인격’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주체가 되며, 자유로이 자신을 내어 주고 다른 인격들과 친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모든 인간에 대한 창조주의 특별한 사랑은 “인간에게 한없는 존엄을 부여”**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 존엄 수호를 위하여 노력하는 이들은 이러한 노력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를 그리스도 신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삶이 순전한 우연이나 무한한 순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희망 없는 혼돈 속에 떠다니지 않고 있다는 확신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창조주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예레 1,5).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서 생겨났고, 이러한 이유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사유의 산물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사랑하시고 필요로 하시는 존재입니다.”***

*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제2판 12쇄), 357항.
** 요한 바오로 2세, 독일 오스나브뤼크에서 장애인들과 바친 삼종 기도, 1980.11.16., 『요한 바오로 2세의 가르침』, 3/2(1980), 1232.
*** 베네딕토 16세, 교황 즉위 미사 강론, 2005.4.24.,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34호(2005),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31면, AAS 97(2005), 711면.

 

66. 창세기에 나오는 상징적이고 서사적인 고유한 언어로 표현된 창조 이야기는 인간의 실존과 그 역사적 실재에 대한 깊은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은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세 가지 관계, 곧 하느님과의 관계, 우리 이웃과의 관계, 지구와의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이 세 가지 핵심적인 관계는 이 세상과 우리 안에서 깨어졌습니다. 이러한 불화가 죄입니다. 창조주와 인류와 모든 피조물의 조화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여기고 피조물로서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아서 깨어졌습니다. 결국 이는 이 땅을 “지배”(창세 1,28)하는 우리의 임무, 곧 “그곳을 일구고 돌보는”(창세 2,15) 임무를 왜곡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과 자연이 맺은 본디의 조화로운 관계가 충돌하게 되었습니다(창세 3,17-19 참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모든 피조물과 체험한 그 조화가 이러한 불화의 치유로 여겨진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모든 피조물과 맺은 보편적 화해를 통하여 어느 모로 본디의 순수 상태로 돌아가려 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는 거리가 멉니다. 현재 상황에서 죄는 전쟁, 여러 가지 형태의 폭력과 학대, 가장 취약한 이들의 유기, 자연에 대한 공격에서 모든 파괴적인 힘으로 드러납니다. 
* 보나벤투라, ‘프란치스코 성인의 주요 전설’, Ⅷ, 1, FF 1134 참조.


67. 우리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지구는 우리보다 앞서 존재하였고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유다-그리스도교의 사상에 대한 비난에 응답하도록 해 줍니다. 사람들은 인간이 땅을 “지배”(창세 1,28)하게 했다는 말이 창세기에 나온다는 것을 근거로, 인간을 본성적으로 지배적이고 파괴적인 존재로 묘사하면서 유다-그리스도교 사상이 무분별한 자연 착취를 조장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교회가 이해한 바른 성경 해석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때로는 성경을 부정확하게 해석한 것이 사실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과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우리에게 이 땅에 대한 지배가 부여되었다는 사실이 다른 피조물에 대한 절대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강력하게 부인해야 합니다. 성경 구절은 그 맥락 안에서 올바른 해석학을 통하여 읽어야 합니다. 성경 구절은 우리가 세상이라는 정원을 ‘일구고 돌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창세 2,15 참조). ‘일구다’라는 말은 밭을 경작하고 갈거나 밭일을 한다는 뜻이고, ‘돌보다’라는 말은 보살피고 보호하며, 감독하고 보존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인간과 자연이 서로 책임을 지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모든 공동체는 생존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풍요로운 땅에서 얻을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이 땅을 보호하고 후손들을 위하여 이 땅이 계속해서 풍요로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해야 하는 의무도 있습니다. ‘땅은 주님의 것입니다’(시편 24[23],1 참조). 그래서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신명 10,14)은 주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절대적 소유에 대한 모든 주장을 물리치십니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 

68. 하느님께 속한 땅에 대한 책임은, 지성을 지닌 인간이 자연법과 이 세상의 피조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정교한 균형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명령하시자 저들이 창조되었고 그분께서 저들을 세세에 영원히 세워 놓으시고 법칙을 주시니 아무도 벗어나지 않았기”(시편 148,5-6) 때문입니다. 성경의 율법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와의 관계를 위한 다양한 규범을 인간에게 차근차근 제시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동족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져 있는 것을 보거든, 그것들을 모르는 체하지 말고 반드시 너희 동족을 거들어 일으켜 주어야 한다. 너희가 길을 가다가 나무에서건 땅에서건 어린 새나 알이 있는 둥지를 보았을 때, 어미 새가 어린 새나 알을 품고 있거든, 새끼들과 함께 어미 새까지 잡아서는 안 된다”(신명 22,4.6). 이와 같은 이유로, 이렛날에 쉰다는 것은 인간이 쉰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와 나귀도 쉰다.”(탈출 23,12 참조)는 것도 의미합니다. 분명히 성경에서는 다른 피조물을 고려하지 않는 자의적인 인간 중심주의가 통하지 않습니다. 

69. 우리는 이 땅의 재화를 책임 있게 사용해야 하고, 또한 다른 생명체들도 하느님 보시기에 고유한 가치가 있음을 깨달을 것을 요청받습니다. “동물은 단순히 생존함으로써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업적으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시편 104[103],31 참조). 인간은 고유한 존엄과 지성을 지녔기에 피조물과 그것의 고유 법칙을 존중할 것을 요청받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지혜로 땅을 세우셨기”(잠언 3,19 참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마치 다른 피조물들이 그 고유한 가치가 없고 인간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기나 한 듯이 인간의 이익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독일 주교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에 관하여 “유용성보다는 존재가 우선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왜곡된 인간 중심주의를 매우 분명하고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피조물은 저마다 고유한 선과 완전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 저마다 고유한 존재를 지니기를 하느님께서 바라신 다양한 피조물들은, 저마다 고유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무한한 지혜와 선의 빛을 반영합니다. 이 때문에 인간은 각 피조물의 고유한 선을 존중하여 …… 사물의 무질서한 이용을 피해야 합니다.”***
* 『가톨릭 교회 교리서』, 2416항. 
** 독일 주교회의, ‘피조물의 미래와 인류의 미래, 환경과 에너지 대책에 관한 독일 주교회의 성명’(Zukunft der Schopfung–Zukunft der Menschheit. Einklarung der Deutschen Bischofskonferenz zu Fragen der Umwelt und der Energieversorgung), 1980, II, 2. 
*** 『가톨릭 교회 교리서』, 339항.


70.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시기심에 불탄 카인이 어떻게 자기 아우를 상대로 극단적인 불의를 저지르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 불의는 결국 카인과 하느님의 관계, 그리고 카인과 그가 쫓겨난 땅의 관계를 망쳐 버립니다. 이는 하느님과 카인의 극적인 대화에서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이 모른다고 대답하자, 하느님께서는 추궁하며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창세 4,9-11). 내가 책임지고 돌보고 보호해야 할 내 이웃과 바른 관계를 이루어 유지해야 하는 의무를 저버리면, 나 자신, 다른 이, 하느님, 지구와 각각 맺은 관계를 망쳐 버리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관계를 소홀히 하면, 정의가 이 땅에 존재하지 않게 되면, 삶 자체가 위험에 빠지게 된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이는 정의와 평화의 조건을 계속 충족시키지 못하는 인류를 하느님께서 쓸어버리시겠다고 경고하시는 노아의 이야기에 나타납니다. “나는 모든 살덩어리들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들로 말미암아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창세 6,13). 상징으로 가득 찬 이러한 오래된 이야기들은 이미 오늘날 우리가 공유하는 확신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곧 모든 것은 서로 관계를 맺고, 우리 자신의 삶과 자연과 맺은 관계를 올바로 돌보는 것은 형제애, 정의, 다른 이에 대한 충실함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71.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자”(창세 6,5) 하느님께서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창세 6,6)하셨지만, 하느님께서는 의롭고 흠 없는 노아를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서는 인류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희망을 되찾는 데에는 의로운 한 사람으로 충분합니다! 성경 전통은 이러한 회복에 하느님께서 직접 자연에 새겨 놓으신 순환의 재발견과 존중이 동반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이는 안식일의 율법에도 나타납니다. 이렛날에 하느님께서는 모든 일을 마치고 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렛날마다 쉬도록, 곧 안식일을 지키도록 명령하셨습니다(창세 2,2-3; 탈출 16,23; 20,10 참조). 이와 유사하게 이스라엘은 일곱째 해는 땅을 위한 안식의 해로 지내게 하셨습니다(레위 25,1-4 참조). 이때에는 씨를 뿌려서는 안 되고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 필요한 만큼만 거두어들일 수 있습니다(레위 25,4-6 참조). 끝으로,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내면, 곧 마흔아홉 해가 지나면, 모든 것에 대한 용서와 “땅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해방”(레위 25,10)을 선포하는 희년을 거행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러한 율법의 전개는 인간이 다른 이들과 맺은 관계와 그들이 살고 일하는 땅과 맺은 관계에 균형과 공정을 보장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불어 땅의 결실을 포함하여 땅이 주는 것은 모든 이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땅을 경작하고 돌보는 이들은 그 결실을 특히 가난한 이들, 과부, 고아, 그리고 그들 가운데 있는 이방인들과 공유해야 하였습니다.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밭 구석까지 모조리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고 남은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너희 포도를 남김없이 따 들여서는 안 되고,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를 주워서도 안 된다. 그것들을 가난한 이와 이방인을 위하여 남겨 두어야 한다”(레위 19,9-10).

72. 시편은 창조주 하느님을 찬송하라고 자주 우리에게 권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땅을 물 위에 펼쳐 놓으신 분”으로 “주님의 자애는 영원”(시편 136[135],6) 합니다. 또한 시편은 우리와 함께 찬미하도록 다른 피조물들을 초대합니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해와 달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반짝이는 모든 별들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하늘 위의 하늘아 하늘 위에 있는 물들아.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명령하시자 저들이 창조되었다”(시편 148,3-5). 우리는 하느님의 권능으로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마주하며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흠숭하는 것입니다. 

73. 예언자들의 글은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을 관상함으로써, 시련의 때에 다시 힘을 얻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권능이 우리를 하느님 부성의 온유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서 사랑과 권능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건전한 영성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그 무한한 권능에 대한 신뢰로 주님을 찬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시는 바로 그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 두 활동 방식은 긴밀하고 분리할 수 없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 주 하느님, 당신께서는 큰 권능과 뻗은 팔로 하늘과 땅을 만드셨으니, 당신께는 어려운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 당신께서는 표징과 기적들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예레 32,17.21).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이사 40,28-29). 

74. 바빌론 유배의 경험은 영적 위기를 가져왔으나, 이 위기가 하느님에 대한 더욱 깊은 믿음을 이끌어 냈습니다. 그 경험은 하느님의 창조적 전능을 드러내어 불행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되찾으라고 사람들에게 촉구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수 세기가 지난 다음, 로마 제국이 절대 지배를 행사하려는 가운데 찾아온 또 다른 시련과 박해의 시기에, 믿는 이들은 전능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다시 굳세게 하여 위로와 희망을 찾으며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 주님의 길은 의롭고 참되십니다”(묵시 15,3).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관여하시고 온갖 악을 물리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의가 무적은 아닌 것입니다.

75.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망각하는 영성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만약 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세상의 다른 힘 있는 것을 숭배하거나 하느님의 자리를 빼앗고, 심지어 그분의 피조물을 우리 발아래 두며 짓밟아 버리는 제한 없는 권리를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의 절대적 지배에 대한 인간의 주장을 멈추고 인간이 제자리를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창조주이시며 이 세상의 유일한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간이 언제나 자기만의 법과 관심을 강요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 한국천주교주교회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