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고 내 뒤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내게 마땅하지 않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마태 10,38-39. 16,25).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 누가 자기 친구들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것,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명하는 것을 여러분이 행하면 여러분은 나의 친구들입니다(요한 15,12-14).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성 이냐시오 김제준은 일명 시명으로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성인의 부친이며 충청도 면천지방 솔뫼에서 태어났다. 조부인 김진후와 백부의 권면으로 입교하였고, 신앙생활을 위해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짓고 살던 중 서양신부들이 입국하자 모방 신부를 찾아가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고 용인으로 돌아와 회장으로 교회일을 보며 활약하던 한편, 15세 된 큰 아들 김대건을 모방 신부에게 맡겨 마카오로 유학보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8월 사위 곽씨를 앞세운 밀고자 김여상 일당에게 체포되었다. 포청과 의금부에서 아들을 외국에 내보낸 국사범으로 처리되어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해 한 때 배교하였으나 형조로 이송되어서는 배교를 취소하고 신앙을 훌륭하게 지켜 9월 26일 43세로 서소문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성녀 막달레나 박봉손은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15세경 시골로 출가하여 딸 둘을 낳은 다음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왔다. 계모 김 세실리아의 권면과 가르침으로 1834년에 입교하였다. 그후 2년 뒤인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로 친정식구와 함께 살고 있던 여러 가구의 교우들은 피신하였으나 홀로 집을 지키고 있다가 7월초 잠시 집에 들른 외삼촌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겸손하고 인내하며 자기를 잊기에 이르기까지 헌신적이고 한결에 대해 말하기를 "그는 한 가지 걱정밖에 없었으니 즉 자기의 본분을 소홀히 할까 하는 것이었다. 하느님께 대한 그의 사랑과 사람들에 대한 그의 애덕의 열렬함을 누가 일찍이 측량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했다. 그는 포청과 형조에서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최후로 형관에게 "여기까지 온 것은 위주치명爲主致命하기 위해 온 것이니 국법대로 죽여 주십시오"라고 신앙을 고백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9월 26일 43세로 서소문밖 형장에서 다른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성녀 페르페뚜아 홍금주는 서울 근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조모에게서 자랐다. 10세 때에 입교하였으나 15세 경 외교인과 결혼한 뒤에는 냉담한 생활을 하였다. 남편이 사망하자 교우들의 격려에 힘을 얻어 다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다.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였고 어렵게 살면서도 열심히 수계하였다. 사람들은 "종과 같이 모든 일에 남을 도와주었다"고 말하며 그의 자선심을 칭찬하였다. 그는 종종 "나는 붉은 옷을 입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말하면서 순교의 원의를 밝히기도 하였다. 1839년 3월 행랑살이 하고 있는 최 필립보의 집에서 그의 제수와 함께 체포되었고,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을 당했으나 기꺼이 이겨내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형이 집행될 때까지 6개월 동안 형조 옥에 갇혀 있으면서 함께 갇힌 교우들과 죄수들을 돌봐주며 오직 사랑과 봉사로 옥살이를 하다가 9월 26일 35세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녀 골롬바 김효임은 성녀 김효주의 언니로 서울 근교 밤섬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친을 여읜 후 가족과 함께 입교하여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고, 그 뒤에 두 여동생, 글라라와 김효주와 함께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다. 매주 두 차례씩 대재大齋를 지키면서 병약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성심껏 돌보아주어 그 덕행과 아름다운 모범에 교우들뿐 아니라 외교인들까지 감탄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4월 이사해 살고 있던 경기도 고양땅 용머리에서 동생 김효주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남동생 김 안토니오의 피신처와 교회서적을 감춘 곳을 알려는 관헌에게 매우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다. 동생과 함께 학춤이라는 혹형 이외에 불에 달군 소꼬챙이로 모의 셜 세곳을 지져대는 잔혹한 고문을 당했으며, 옷을 벗긴 채 남자 죄수의 방에 넣어지기도 하였다. 남자 죄수의 방에서는 갑자기 신비스러운 힘이 생겨 흉악한 죄수들이 감히 두 자매를 범할 수 없었다. 이렇게 포청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김효임은 동생과 함께 형조로 이송되었으며, 형조판서의 신문에 겸손하고 영리하게 대답하여 형조판서를 감동시켰고, 신문 후 포청에서의 불의한 고문과 능욕에 대해 항의, 결국 자신과 동생에게 능욕을 가한 포졸들은 귀양 가게 되었다. 그 뒤 5개월 동안 옥에서 병가 고통과 싸우며 순교를 준비하던 중 9월 26일 25세의 나이에 서소문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20여일 먼저 순교한 동생의 뒤를 따라 순교하였다.
성녀 김 루시아는 서울의 어느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부터 신자였는데 몸이 불구여서 외교인들은 곱추할멈이라고 불렀고 교우들은 곱추 루시아라고 불렀다.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입교했으나 남편과 가족들이 모두 외교인이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결국 집을 나와 교우들의 도움으로 살며 궂은 일과 병약자들을 돌보는 일에 온갖 정성을 기울여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는 불구였고 무식하였지만 조리있는 대답은 상식 이상이었다고 한다. 어떤 양반이 "지옥이 좁다고 하니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들어갈 수 있을꼬?" 하니 당신의 작은 마음은 비록 만 권의 서적을 품고 있어도 그것 때문에 좁다고 생각해 본 일이 있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곧 체포되었고 포청에서 71세라는 고령을 생각하여 극심한 형벌은 받지 않고 교활한 심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였다. 태형 30대를 맞고 쓰러져 9월 어느 날 옥에서 운명하였다.
성녀 이 카타리나는 성녀 조 막달레나의 모친으로 시골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와 함께 입교하였다. 14살 때 교리에 밝지 못한 부모의 뜻에 따라 조씨 성을 가진 외교인 청년과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고 남편을 권면하여 죽을 때 대세를 받도록 주선하였다. 1838년말 고향에서 지방 포청에 의한 박해가 일어나자 가산을 버리고 자녀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빈손으로 올라왔기 때문에 교우 집 곁방살이를 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1839년 6월 큰 딸 조 막달레나, 주인집 세 모녀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딸과 함께 한 차례의 주뢰형을 받고 별다른 형벌과 고문 없이 옥에 갇혔으나 옥이 너무 비좁고 불결하여 병을 얻었다. 감옥살이 3개월째 되던 9월 어느 날 염병에 걸려 56세로 숨을 거두고 꿈에도 그리던 주님의 품에 안겨졌다. 이 카타리나에 대한 자료는 구체적인 것이 없으며 밝혀진 바로는 그의 생애와 가해진 형벌이 그의 영광을 빛나게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가난하고 비천하게 살면서도 하느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이를 자식들에게도 물려줘 함께 순교할 수 있었으니 이를 가지고도 그의 영광은 빛을 발할 것이다.
성녀 조 막달레나는 성녀 이 카타리나의 딸로서 시골에서 태어나 어려서 모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는데 8세경에 외교인 친척들의 천주교에 대한 반대로 외가에 가서 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살 때 혼담이 생기기 시작하지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교우들의 집을 전전하며 어렵게 살아가다가 다시 고향에 내려와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외교인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죽어가는 어린이들에게 대세를 주는 등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다. 1838년 고향에서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자 모친과 두 동생과 함께 가산을 버리고 서울로 피신하여 조 바르바라 교우 집에 머무르고 있던 중, 1839년 6월 모친과 주인집 세 모녀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모친과 함께 배교를 강요당하며 한 차례의 심문과 주뢰형을 받고 별다른 형벌이나 고문없이 옥에 갇혀 있었는데 옥에서 소약해진 몸으로 서로 용기를 북돋아 주다가 옥살이 3개월 되던 9월 어느 날 염병에 의해 32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소년 성인 베드로 유대철은 성인 유진길의 아들이며 서울의 유명한 역관譯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의 모범과 가르침을 받아 입교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영웅적으로 순교하였고 아버지도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순교하기로 결심하여 자수하였다. 재판관들은 13세의 어린 소년을 배교시키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다 사용하였지만 소년 유 베드로의 마음은 변치 않았다. 어린 나이로 견디기 어려운 혹형과 고문을 이겨냈다. 허벅지의 살을 뜯어내며 "이래도 천주주교를 믿겠느냐?"하고 으름장을 놓는 형리에게 "믿고말고요. 그렇게 한다고 제가 하느님을 버릴 줄 아세요?"라고 대답했다 한다. 관원들은 어린 소년을 공공연하게 죽이면 군중이 반발할까 두려워 1839년 10월 31일 형리들을 옥 안으로 들여보내 상처투성이가 된 그 가련한 작은 몸뚱이를 움켜잡고 목에 노끈을 잡아매어 죽이도록 하였다. 가장 나이 어린 순교자인 유대철 베드로는 아버지와 함께 순교하여 신앙의 모범이 되었다.
성녀 체칠리아 유소사(柳召史: 별명)는 시골에서 태어나 20세 때 상처喪妻한 정약종의 후처로 결혼, 남편의 권고로 3년 후 입교하여 주문모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1800년 살고 있던 양근 지방에 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따라 서울로 이주했으나 이듬해 신유박해로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고, 남편과 전처 아들 정철상이 순교한 후 석방되어 양근 마재에 사는 시동생 정약용의 집에서 정하상, 정정혜 남매를 데리고 매우 어렵게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조카 한 사람이 시골로 피신하라고 권하였으나 "나는 항상 순교하기를 원하였으니 내 아들 바오로와 함께 순교하고 싶네"라고 거절하였고, 결국 7월 11일 아들 정하상, 정정혜와 함께 체포되었다. 70세 이상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포청에서 모두 12차례에 걸쳐 태장 230대를 맞고 4개월간 옥에서 신음하다가 7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성 베드로 최창흡은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성녀 손소벽의 남편이었으며 성 최창현의 동생이었다. 어려서 입교하였으나 냉담한 생활을 해오다 30세경 결혼한 뒤 아내와 함께 새로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지자 아내와 함께 대세를 받고 이때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사위 조신철이 북경에서 가져온 교회 물건들이 발견되어 이 때문에 수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당해야 했다. 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옥졸에게 "여감방에 있는 내 아내와 딸에게 가서 내 운명을 슬퍼하지 말라고 전해주게. 그것은 너무나 인성을 따르는 감정이어서 진실한 신자에게 마땅치 않는 일이니 오히려 주님을 찬미하고 이러한 큰 은혜를 주님께 감사하며 잊지 말고 나를 따라 오라고 전해주게"하고 말하였다고 한다. 가장家長으로서 눈물겨운 신앙적인 당부로 우리 마음을 뜨겁게 한 성인은 12월 29일 52세로 6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성녀 바르바라 조증이는 성인 남이관 회장의 부인으로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16살 때 남이관과 결혼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 친정아버지와 시부모가 순교하였고, 남편은 경상도 단성으로 유배되자 그는 친정인 이천에 내려가 10여년을 고생하면서 살았다. 그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먼 친척이 되는 정하상을 도와 성직자 영입에 필요한 자금마련을 위해 노력하면서 1832년 남편이 유배에서 풀려나자 남편과 함께 유방제 신부를 보필하였고, 공소를 세우는 등 교우들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을 친정으로 피신시키고 어린 딸과 함께 집을 지키고 있다가 7월에 체포되었다. 남편인 남이관을 잡으려고 혈안이 된 관헌들에게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끝까지 입을 다물고 신앙을 지키다가 결국 12월 29일 57세로 서소문밖 형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성녀 막달레나 한영이는 성녀 권진이의 어머니로서 본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혼기에 이르러 권진사(進士)라는 외교인 양반의 후처로 들어가 딸 권진이를 두었다. 남편은 중년에 천주교에 뜻을 두었는데, 임종대세를 받고 죽으면서 천주교를 믿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하여 성인은 남편의 간절한 부탁에 따라 딸과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고, 그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 위해 집을 떠나 교우들의 집에 몸 붙여 살아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17일 딸과 이경이와 함께 체포되어 무서운 고문과 형벌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꾸준히 지키다가 다른 교우 6명과 함께 12월 29일 55세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녀 베네딕따 현경련은 성인 현석문의 누나이며 순교자 현계흠의 딸로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주문모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가 순교하였고 그후 어머니를 따라 자주 이사 다니며 살았다. 17세 때 최창현의 아들과 결혼하였지만 3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는 친정에 돌아와 삯바느질을 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도왔다. 항상 규칙적인 독서와 묵상기도를 하는 등 남달리 신앙생활에 몰두하였고 뛰어난 교리지식으로 여회장직을 맡아 외교인들을 가르치고 무지한 교우들을 일깨워주었으며, 냉담자를 권면하고 어린이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대세를 주는 열의를 가져 여회장으로서 교회 일을 성심껏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잠시 피신해 있었으나 6월에 체포되었고 동생 현석문과 주교의 피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에게 두 차례의 주뢰와 300여도의 장을 맞는 혹형을 당하였다. 옥중에서 동생에게 신망애 삼덕을 발하는 내용의 편지를 써보내 이 편지를 읽은 신자들은 감동하였다고 한다. 12월 29일 45세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성녀 엘리사벳 정정혜는 성인 정하상의 동생으로 경기도 광주의 마재에서 태어났다. 네 살 되던 1800년 박해를 피해 가족들을 따라 서울로 이사하였고 이때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다섯 살의 어린나이로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으나 아버지와 이복 오빠 정철상이 순교한 후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석방되어 마재의 삼촌 정약용에게 의지하고 살았다. 그후 서울에서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던 정하상이 거처를 마련하자 모친과 함께 상경, 성직자들의 처소를 돌보며 기도와 희생으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11일 어머니와 오빠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7회의 신문을 받으면서 320대의 곤장을 맞고 형조에서도 6회의 신문과 함께 가혹한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12월 29일 42세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녀 바르바라 고순이高順伊는 성인 박종원의 부인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네살 때 박해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수계하며 생활했다. 18세 때 교우인 박종원과 결혼하여 3남매를 두었고, 가정생활에 모범이라는 칭찬을 교우들로부터 받았다. 가정의 일에 충실하였을 뿐 아니라 회장의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 남편을 도와 냉담자를 권면하고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며 병약자를 돌보는 등 교회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도왔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이 체포된 다음날인 10월 27일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해 살이 터지고 뼈가 드러나며 유혈이 낭자하였으나 남편과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순교하기를 간절히 원하여 순교 전에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전에는 순교 이야기만 들어도 벌벌 떨렸는데 성령께서 나 같은 죄인을 은총으로 감싸주시어 지금은 아무 두려움도 없고 오히려 기쁘기만 합니다"라고 말하였고, 12월 29일 41세에 서소문 밖 형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남편보다 한달 먼저 순교하였다.
성녀 막달레나 이영덕은 성녀 이인덕의 언니이며 서울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어머니 조 바르바라, 동생과 함께 입교하였다. 혼기에 이르러 아버지가 외교인과의 결혼을 강요하자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꾀병을 앓기도 하며 혈서를 써서 아버지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완고한 고집을 꺾을 수 없어 앵베르 주교에게 가출할 수 있도록 청원하였다. 주교가 허락하지 않자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집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서 숨어살았다. 이 사실을 안 주교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다가 그때 양반가문의 풍속에 가출했던 부녀자들이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집 한 채를 마련하여 세 모녀가 살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이제는 마음 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으므로 빈곤의 고통은 오히려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함께 살고 있던 이 가타리나, 조 막달레나 모녀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순교를 결심하고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면 자수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미처 자수할 사이도 없이 6월에 체포되어 6개월 동안 포청과 형조에서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12월 29일 27세로 서소문밖 형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 순교하였다.
성녀 김 데레사는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종한의 딸이며, 성인 김대건 신부의 당고모로 충청도 솔뫼의 독실한 교우가정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교우인 손연욱과 결혼하였고 1824년 남편이 해미에서 순교하자 그후 계속 혼자 살면서 열심히 기도하며 수계하였다. 가난으로 인한 여러 가지 고통 이외에 매주 두 차례 대재를 지켰고, 유방제 신부의 처소를 정정혜와 함께 돌보았으며 앵베르 주교의 입국 후에는 주교의 처소도 돌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11일 정하상 일가와 함께 체포되었으며, 주교의 은신처를 알아내려는 형리들에게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당했으나 순교한 조부와 부친의 모범을 따라 꿋꿋이 이겨냈다. 포청옥에서 만난 이광헌의 어린 딸 이아가타와 함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신앙을 끝까지 지켰다. 6개월 동안 좌기 6차에 280도의 태장을 맞고 44세 되던 1840년 1월 9일, 감옥 안에서 이 아가타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녀 이 아가타는 성인 이광헌과 성녀 권희 부부의 딸로서 어려서부터 부모의 거룩한 표양을 본받아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수계범절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기해박해의 초기인 1839년 4월 7일에 전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에서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다시 포청으로 되돌려 보내졌는데 포청에서 다시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모든 혹형과 고문 그리고 배교를 유도하는 간계를 물리치고 신앙을 굳세게 지켜나갔다. 9개월 동안 곤장 300도, 대곤 70도를 맞고 드디어 1월 9일 포청옥에서 김 데레사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17세의 나이에 순교하였다.
성 스테파노 민극가는 인천의 양반집에서 태어났으며 가족이 모두 외교인이었으나 모친이 사망한 후 부친이 중년에 이르러 가족과 함께 입교하였다. 20세 때 아내를 잃고 부친의 뜻에 따라 재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는데 몇 년 후 재혼한 아내와 딸이 또다시 사망하자 집을 떠나 서울 인천 부평 수원 등지를 떠돌며 교리 서적을 팔아 생활해 나갔다. 교회서적을 베껴주기도 하면서 얻은 돈을 자기 생활비와 애긍에 이용하였고 그의 열성과 박애정신을 보고 신부들이 회장에 임명하였다. 그는 가는 곳마다 냉담자들을 권면하고 외교인들을 가르치는 일 그리고 자선사업에도 회장 임명 전보다 더 열심히 하였다. 그후 1839년 기해박해로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자 서울과 지방의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회장의 직무를 성실히 이행하던 중 12월에 서울 근교에서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혹형과 고문 그리고 유혹 등을 모두 물리치고 신앙을 지켰으며, 배교하면 석방시키겠다는 형리들에게 "만약에 나를 놓아주면 다시 신앙생활을 더 열심히 준행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더 많이 전교하겠습니다"라고 말하여 형리들의 감정을 더 격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1840년 1월30일 53세로 포청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 안드레아 정화경은 충청도 정산의 부유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열심히 수계하였고, 성장해서는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수원 근처로 이사하여 살면서 회장일을 맡아보며 공소를 세우는가 하면 서울을 왕래하며 힘껏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교우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순교를 예비시키는 한편 피신해 온 앵베르 주교를 맞아 은신처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주교를 찾고 있는 밀고자에게 속아 주교의 은신처를 알려주었고, 또다시 신부들을 잡으려고 밀고자 일당이 계교를 꾸미자 이를 눈치 채고 피신한 후 신부를 찾아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보았다. 9월에 체포되어 포청에서 주리를 틀리고 대꼬챙이로 찌르는 형벌을 받았으며 100대의 치도곤, 매질 등의 형벌을 받았으나 용감히 참아 받았다. 다섯 달 동안 옥고의 고통을 받았지만 조금도 마음을 굽히지 않고 계속 신앙을 증거하다가 마침내 1840년 1월 23일 33세에 포청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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