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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성인.성녀

[스크랩] 한국 103위 순교성인 61-80위

 

제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고 내 뒤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내게 마땅하지 않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마태 10,38-39. 16,25).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 누가 자기 친구들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것,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명하는 것을 여러분이 행하면 여러분은 나의 친구들입니다(요한 15,12-14).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성 바울로 허임은 독실한 교우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기해박해가 치열했던 1839년 8월경에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의 신분이 훈련도감의 병정이어서 포청에서의 형벌과 고문은 남달리 혹독했다. 너무 심한 고문과 혹형에 배교를 하여 풀려나왔으나 곧 후회하고 배교를 취소하였다. 형리가 배교를 취소한다는 표시로 똥물을 마셔야 한다고 했을 때 서슴치 않고 한 사발을 떠서 마시고 또 두 번째로 떠 마시려고 하자 형리들이 깜짝 놀라며 그를 말렸다고 한다. 그 뒤 여러달 동안 포청옥에서 치도곤 130도 이상을 맞는 혹형과 고문을 당했지만 한결같은 신앙으로 이를 이겨내고 1840년 1월 30일 45세로 포청옥에서 옥사하였다. 

 

 

 

 

성 아우구스띠노 박종원은 일명 이선으로 성녀 고순이의 남편이며 서울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매우 가난하게 살았으나 모친과 함께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성장해서 교우인 고순이와 결혼하여 3남매를 두고 모범된 가정을 이루었다. 교리를 많이 알고 있어서 전교에 힘을 쏟으면서 임종자에게 대세를 주었으며 그의 성품은 온화하여 성을 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덕과 재능이 앵베르 주교에게 알려져 회장에 임명되었으며, 회장의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여 교회를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교우들과 연락하는 한편 뿔뿔이 흩어진 교우들을 찾아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주다 10월 26일 체포되었다. 그 이튿날 체포된 아내와 함께 포청에서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기꺼이 이겨내고 부인 고순이가 순교한지 한달째 되던 1840년 1월 31일 48세로 당고개堂峴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 베드로 홍병주는 성인 홍영주의 형으로 명문 양반의 후예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로 조부 홍낙민이 순교하자 부친을 따라 충청도 서산의 여사울로 이사하였다. 그 곳에서 자라면서 대대로 이어온 신앙을 물려받아 열심히 기도하며 수계하였고 동생 홍영주와 함께 충청도 내포지바의 회장이 되어 교회 일에 헌신하였다. 형제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은 오로지 신앙과 견실한 학식뿐이었다. 이 유산을 잘 이어받고 이용하여 천주교의 발전에 기여했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해 9월 신부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준 사실이 탄로나 동생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청에서 몇 차례의 형문을 당하고 형조로 이송되었는데 친척인 형조판서에게 직접 신문을 받지 않았지만 형조판서로부터 배교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형리에게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1840년 1월 31일 42세로 당고개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성녀 막달레나 손소벽은 성인 최창흡 회장의 부인으로 서울의 열심한 교우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 아버지가 순교한 다음 얼마 후 어머니마저 떠나자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7세 때 최창흡과 결혼한 후 남편과 함께 새로 교리를 배우고, 1821년 전국에 콜레라가 퍼지자 남편과 함께 대세를 받고부터 다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사위 조신철이 북경에서 가져와 맡겨놓은 교회 물건들의 출처 때문에 3차의 주뢰와 태장 260도를 맞는 혹형과 고문을 당해야 했다. 이런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 늘 감사드리면서 "만일 천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내 힘만 가지고는 내 몸을 뜯어먹는 빈대 벼룩조차 잠시라도 견디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시련을 참아 받는 힘은 주님에게서만 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형조에서도 3회의 형문을 당했으나 모두 이겨내고 39세가 되던 1840년 1월 31일 6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녀 아가타 이경이李瓊伊는 시골의 교우가정에서 태어나 혼기에 이르자 어떤 내시에게 속아 결혼했으나 곧 집으로 돌아왔고 앵베르 주교에게 청하여 그 결혼이 무효임을 인정받았다. 그뒤 부친을 여의고 생계가 막연해지자 모친을 외삼촌에게 맡기고 상경하여 한영이, 권진이 모녀의 집에 기거하면서 두 모녀와 함께 열심히 수계하며 항상 기도하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한 배교자의 밀고로 한영이, 권진이 모녀와 함께 체포되었다. 평소 이경이의 미모를 탐내던 밀고자의 간교로 한영이만 포청으로 끌려가고 이경이는 권진이와 사관청에 갇히게 되었는데 밀고자가 이경이와 권진이를 납치하려하자 한 포졸의 도움으로 사관청을 탈출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숨어있던 교우의 집에서 또 다시 체포되어 1840년 1월 31일 27세로 당고개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녀 마리아 이인덕은 성녀 이영덕의 동생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서 교우인 외할머니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어머니인 조 바르바라 언니와 함께 입교하였다. 그는 성격이 온화하고 정직하며 극히 겸손하여 그의 언행은 거의 남 앞에 드러나지 않을 정도였다. 1839년 6월 기해박해로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체포되어 잔악한 매질을 당했지만 조금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형조에서 나라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인덕은 그 믿음이 절대적이어서 그만큼 더 심하게 미혹하고 더 강하게 믿으며, 외국 사람들은 만나고 그들에게서 요술妖術을 배우고 인륜을 어기어 사형 당하기를 원한다"고 되어 있다. 마리아 이인덕은 1840년 1월 형조로부터 외국인과 만나 깊이 사학을 믿고 이를 숭배하였다는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1월 31일 22세 나이로 당고개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녀 아가타 권진이權珍伊는 성녀 한영이의 딸로서 서울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 권진사가 임종때 천주교를 믿으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자 부친의 뜻을 따라 모친과 함께 입교하였다. 13세 경 교우청년과 결혼했으나 남편이 너무 가난하여 남편과 떨어져 정하상의 집에서 살았다. 1833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입국한 후로는 신부의 처소를 돌보았고, 그뒤 유신부가 조선을 떠나자 어머니에게로 돌아가 한 집에 살게 된 이경이와 함께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 17일 한 배교자의 밀고로 모친과 이경이와 함께 체포되었다. 평소 권진이와 이경이의 아름다움을 탐내던 밀고자의 간교로 한영이만 포청으로 끌려가고 권진이와 이경이는 사관청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 밀고자가 납치하자 한 포졸의 도움으로 사관청을 탈출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숨어있던 교우집에서 다시 체포되어 이듬해 1월 31일 21세의 나이로 당고개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바울로 홍영주는 성인 홍병주의 동생으로 명문 양반의 후예로 서울에서 태어나 충청도 내포지방의 여사울에서 자랐다. 대대로 내려온 신앙을 이어받아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였고, 형인 홍병주와 함께 내포지방의 회장으로 임명되어 교회의 여러 가지 일에 헌신 노력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서양신부들이 체포되자 9월말에 이르러 형과 함께 서양 신부들의 은신처를 제공하였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1840년 2월 1일 39세로 하루 먼저 순교한 형의 뒤를 따라 2명의 교우와 함께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요한 이문우는 경기도 이천의 양반 교우가정에서 태어나 다섯살 때 양친을 여의고 서울의 오 바르바라라는 여교우에게 입양되어 성장하였다. 일명 경천이라고 했던 그는 독신생활을 원하였지만 양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순종으로 양모의 뜻에 따라 결혼하였다. 결혼 몇년 후 아내와 어린 두 자녀가 사망하자 주위의 재혼 권유를 뿌리치고 독신으로 생활하였다. 앵베르 주교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주교의 일을 도와 지방을 순회하면서 각처의 교우들 소식을 성직자들에게 보고하면서 그 지도를 받아 교우들을 격려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된 교우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사방에서 희사를 모으고 주교에게 박해의 갖가지 상황을 보고하면서 회장의 직무를 성실히 이행하였다. 그는 11월 11일에 체포되었는데, 이때 "주님께서 특은으로 나를 부르시니 어찌 그분의 부르심에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는 의연한 모습을 보이며 오히려 당황해 하는 포졸을 재촉하여 포청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후 이듬해 2월 11일 31세로 당고개에서 2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가 옥중에서 쓴 긴 편지는 신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는데 여기에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잘 나타나고 있다.

 


 

 

 

성녀 바르바라 최영이崔榮伊는 성인 조신철의 부인으로 서울에서 성인 최창흡과 성녀 손소벽 부부의 딸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의 모범을 따라 입교하면서 열심히 살았다. 20세 때 상처한 조신철과 결혼하였고 아들 하나를 두었으며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던 남편을 도와 헌신적으로 내조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과 함께 피신했으나 6월에 친정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친정식구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체포될 때 어린 젖먹이 때문에 배교할까 염려되어 친척에게 맡기고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 남편이 중국에서 가져온 교회서적과 성물 때문에 2차례의 주뢰와 태장 260도를 맞는 혹형을 당했으나 굴하지 않았고 형조에서도 3차의 형문을 이겨내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1840년 2월 1일 22세의 나이로 당고개에서 2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 안또니오 김성우는 경기도 광주 귀산에서 부유한 가정의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어 입교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천주교를 알게 되자 두 동생과 함께 곧 입교, 열렬한 신앙으로 친척과 이웃에게 전교하여 자신의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그 뒤 중년에 이르러 양친을 여읜 다음 서울로 이사하였고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으며, 회장으로 임명되어 자신의 집을 공소로 개조하고 교우들을 돌보며 신부를 보필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피신하였는데 고향 귀산에 남아있던 두 동생만 체포되어 큰 동생 김덕심은 1841년에 옥사했고 작은 동생은 여러 해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피신해 있던 김성우도 1840년 1월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기꺼이 이겨냈고 오히려 감옥을 자신의 집처럼 생각하며 함께 갇힌 외교인 죄수들에게 전교하여 그중 두 명을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1841년 4월 28일 치도곤 60도를 맞은 후 이튿날인 4월 29일 15개월 동안의 긴 옥살이 끝에 포청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46세)

 


 

 

 

성 현석문 가를로, 순교장소: 새남터, 형벌: 군문효수, 나이: 49세

 


  

 

 

성 베드로 남경문은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20세 때 교우인 허 바르바라와 결혼, 이를 계기로 입교하였다. 얼마 후 중병이 들어 대세를 받았으며 병이 낫자 열심히 수계하고 신앙생활에 매진하여 유방제 신부를 보필하며 전교에 힘쓰자 회장으로 임명받기까지 했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배교하여 석방된 후로는 냉담하기 시작, 첩까지 거느리고 사는 방탕한 생활을 3년 동안 계속하였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자 다시 고해와 성세성사를 받았고, 지난날의 생활을 뉘우치고 그 죄를 보속하기 위해 순교를 결심하고 다시 열심히 수계하였다.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된 임성룡의 밀고로 7월에 체포되었는데 체포 때 신분이 금위영의 군인이었기 때문에 관헌들에게 가혹한 형벌과 고문, 그리고 배교의 유혹을 받았지만 이 모든 것을 이겨냈다. 9월 20일 포청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50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성 라우렌시오 한이형은 충청도 덕산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14세 때 입교하였고, 21세 때 교우처녀와 결혼한 뒤 경기도 양지의 은이 마을로 이사해 살았다. 원래 정직하고 헌신적인 성격을 가진 그는 뛰어난 덕행과 모범적인 신앙을 하였기 때문에 앵베르 주교의 입국 후 회장으로 임명되어 자선사업과 전교에 힘을 쏟았다.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고 병오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을 피신시킨 다음 혼자 집을 지키다가 체포되었는데, 체포된 그 자리에서 포졸들에게 심한 매를 맞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압송될 때 이미 상처투성이의 몸이라 포졸들이 말에 태워 가려했으나 한사코 거절하고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산을 오르신 그리스도를 묵상하면서 백리가 넘는 길을 맨발로 끌려갔다. 포졸들도 "정말 천주교 신자가 되려면 한이형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고통을 묵묵히 참았다고 한다. 포청에서 체포될 때와 같이 심한 매와 형벌을 받았으나 불평없이 참아 받다가 9월 20일 최후로 곤장 70도를 맞은 후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47세로 순교하였다.

 


 

 

 

성녀 수산나 우술임禹述任은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나 15세 때 인천에 사는 교우 청년과 결혼하여 남편의 가르침으로 입교하였다. 1828년 체포되어 사형당할 뻔했으나 해산이 임박하여 두 달간의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어 나왔는데 그때 당한 형벌과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남편을 여의고 1841년에 상경하여 교우들에게 의지하며 살다가 이간난의 집에 머무르게 되어 과부인 이간난과 함께 서로 돕고 살면서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김 신부의 처소에 남아있던 여교우들이 이간난의 집을 거쳐 새 집으로 피신하게 되고, 이때 이간난도 함께 피신하였으나 우술임은 홀로 남아서 이간난의 집을 지키고 있다가 결국 7월 11일에 체포되었다. 9월 20일 매를 맞아 거의 반죽음이 된 상태에서 교수형을 받고 4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성 요셉 임치백은 서울 한강변의 부유한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성이 유순하고 덕을 사랑하여 친구들이 많았으며 그의 언행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1830년경 처음으로 천주교를 알게 되었는데 입교하지는 않았다. 다만 천주교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교우들을 절대적으로 신용하고 그들을 도와주었다. 1846년 5월 그의 아들 임성룡이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되자 아들이 갇혀있는 옹진수영을 찾아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천주교인이라고 속이고 자수하였다. 며칠 후 서울로 압송되었고 포청에서 김대건 신부를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김대건 신부로부터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한 강론을 듣고 즉시 세례를 받았고 순교를 결심, 결국 9월 20일 정오부터 해가 질 때까지 매를 맞은 후 포도청 감옥에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42세). 포정에서 취조 중 관원들이 "십계명도 외우지 못하면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느냐" 하고 말하자 "무식한 자녀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부모께 효도를 할 수 있듯이 나는 배운 것은 없지만 하느님께서 나의 아버지이신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하여 불충분한 교리 지식이지만 주님께 향한 마음은 누구보다 열렬함을 나타내 보였다.

 


 

 

 

 

성녀 데레사 김임이金任伊는 서울 관우물골의 교우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인의 전기를 읽고 그 덕행을 본받기를 좋아하였으며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신앙생활에만 몰두하였다. 20세 때 부친이 사망하자 오빠 베드로와 함께 친척들의 집을 전전하며 살았고, 1839년 기해박해 후에는 이문우의 양모 오 바르바라의 집에서 살았다. 1845년부터는 김대건 신부의 처소를 돌보며 살았는데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기쁘게 받아들었다.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신부집에 남아있던 여교우들과 함께 현석문이 마련한 새 집으로 피신하였으나 7월 11일 현석문, 정철염, 이간난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 20일 매를 맞아 거의 반죽음이 된 몸으로 6명의 교우들과 함께 교수형을 받아 35세 나이에 순교하였다.

 


  

 

 

성녀 아가다 이간난李干蘭은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세에 결혼하였지만 3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살았다. 이때 외할머니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천주교를 알게 되었으며 입교 후 유방제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그는 재가하라는 주위의 권고를 물리치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온갖 정성을 다 바쳤다. 성품이 곧은 데다 신심이 확고했던 이 아가다는 희생과 극기의 생활을 하였으며 특히 대재를 잘 지키어 교우들에게 "거울같이 맑고 눈같이 희다"는 평판을 들었다고 한다. 1846년 5월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자 포졸들의 수색을 피해 현석문 회장이 마련한 집에 피신해 있던 중 7월 11일 현석문, 정철염, 김임이, 우술임 등과 함께 체포되었고 9월 20일 포청에서 매를 맞아 거의 반죽음이 된 몸으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순교하여(32세) 하느님의 자애로운 품에 안기게 되었다.

 


 

 

 

 

성녀 가타리나 정철염鄭鐵艶은 경기도 수원의 교우가정에서 내어났다. 성장해서 포천의 김씨 성을 가진 한 양반집에 하인으로 들어갔는데 이때 주인 가족의 한사람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20세 때 동짓날 주인으로부터 미신적인 동짓날 행사에 참석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여 주인에게 혹독한 매를 맞았고 이듬해 봄에 다시 그런 사태가 일어나자 서울로 피신하여 교우들 집에 몸 붙여 살았다. 그후 1845년 김대건 신부의 가정부로 들어가 신부의 처소를 돌보았고, 이듬해 5월 김 신부가 체포되자 현석문이 마련한 집에 피신해 있던 중 7월 11일 현석문, 김임이, 이간난, 우술임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한결같은 신앙으로 이겨내고, 9월 20일 매를 맞아 거의 반죽음이 된 몸으로 6명의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아 29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성 베드로 유정률劉正律은 평양 대동군 율리면 답현리 일명 논재에서 내어났다. 어려서 고아가 된 후 짚신을 엮어 팔면서 어렵게 살았다. 1864년경 천주교를 알게 되어 즉시 서울로 올라와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1866년 2월 16일 친척들에게 음력 명절의 세배를 마치고 "안녕히들 계십시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자신의 순교를 예감한 듯 작별인사를 했는데, 기묘하게도 그날 저녁 이웃 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교우들과 모여 성서를 낭독하던 중 집주인인 정 빈첸시오 회장, 우세영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평양 감영으로 끌려갔다. 평양 감영에서 이미 체포된 100여명의 교우들과 함께 문초를 받았고 혹형과 고문으로 많은 교우들이 배교하였지만 굳건히 신앙을 지켰다. 이에 화가 난 감사 정지용이 배교한 교우 들로 하여금 한 사람이 세 대씩 때리게 하여 결국 체포된 다음날인 2월 17일 매를 맞다 29세의 나이로 장하치명杖下致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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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phjyoh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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