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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성인.성녀

[스크랩] 한국 103위 순교성인 1-20위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 권상연 야고보
 
 

 

 

 

 

 

 

 

성 안드레아 김대건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아들로 태어나 순교자인 증조부와 부친의 영성을 배우며 자라났다. 1836년 16세 때에 최방제 프란치스꼬와 최양업 토마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그 이듬해 마카오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1844년 부제품을 받았으며, 1845년 8월 17일 상해 부근 긴가함이라는 교우촌의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귀국한 후 국내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외국 신부들의 입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1846년 6월 5일 백령도에서 중국 어선과 연락을 취하고 돌아오는 길에 체포되었다. 해주 감영과 서울에서 4차의 문초와 40차례의 신문을 받는 동안 김 신부의 탁월한 지식과 외국어 실력에 탄복한 일부 대신들은 배교시켜 인재로 등용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이를 거절하고 관리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자 끝내 사형을 선고하였다. 김 신부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에 25세의 나이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형을 받고 순교했지만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정신을 만인들에게 일깨워 주고자 했다.

 

 

 

 

 

성 바울로 정하상은 순교자인 정약종 아우구스띠노와 유세실리아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기도와 교리를 배워 깊은 신앙을 가졌으며 한국천주교회 초기 평신도 지도자였다. 신유박해 때 부친과 친형 철상哲祥이 순교하자 나이 7세인 정하상은 누이동생 정혜와 어머니를 모시고 마재(馬재:경기도 양주군)의 큰 댁으로 내려왔다. 20세 때 단신 상경하여 조증이 바르바라 집에 머물면서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였고 교리와 학문을 철저하게 익히기 위하여 함경도에 귀양 중에 있던 조동섬 유스티노에게 찾아가 수년간 학덕을 연마하기도 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흩어진 신자들을 찾아 신앙의 열기를 북돋우면서 성직자 영입을 위해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 3회나 왕래하였다. 1823년부터는 국내 교회의 실질적인 지도자의 일을 보면서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북경 주교를 통하여 교황청에 보내는 열의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교구 설정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1831년 9월9일 자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조선교구가 설정되었다. 성직자 영입에 지속적인 노력으로 유방제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비밀리에 모셨고, 1837년에는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인 앵베르 주교를 모셨다. 앵베르 주교는 학식과 덕망이 있는 정하상에게 신품성사를 베풀어 한국의 최초 성직자가 되기를 기대하였으나 그 꿈을 이루기 전에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1839년 9월 22일 44세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는데 온갖 고통을 강인하게 참아 나간 모범을 보여 평신도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나타내었다. 자신의 믿음을 순교로써 증거했었다. 정하상의 상재상서上宰相書는 한국 최초의 호교론서護敎論書이며,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하면서 박해를 중단시켜야 할 이유와 주장을 밝힌 내용을 담고 있다. 피를 쏟는 형벌에도 태연자약하였고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으로 가면서도 얼굴에 기쁜 표정을 지녔다고 하니 신앙을 생활화한 산 표본이라 하겠다.

 


   

 

성 베드로 이호영은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난 후 어려서 입교하였는데 부친이 대세를 받고 사망하자 모친과 누이 이소사 아가타와 함께 서울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에 열성을 다 하였다.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을 성실하게 처리하였다. 1835년 2월에 한강변 무쇠막에서 누이 이 아가타와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당하면서 갖은 형벌을 받았다. 감옥 안에서의 고통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여러 차례 혹형을 당하여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살이 터져 피와 고름이 흐르며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을 정도였는데 그 후로도 형조로 이송되어 3차의 형문을 당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성인은 포청과 형조에서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했지만 비명 한마디 없이 참아 내어 인내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형조에서 내린 사형선고의 글귀 중에 사학죄인邪學罪人이라는 문구를 보고 천주교는 사학이 아니라 거룩하고 참된 종교라고 주장하면서 수결手決을 거부하였다. 형리는 억지로 손을 끌어다가 찍게 하였다. 4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온화한 모습을 항상 보여주면서 기도를 계속하였고 누이와 함께 순교하기를 원하였지만 옥에서 얻은 병으로 끝내 1838년 11월 25일 35세에 옥사하였다. 

 


   

 

성 쁘로다시오 정국보는 개성의 명문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직무상 과실로 벌을 받자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 신분을 감추고 새끼 꼬는 일을 하면서 미천하게 살았다. 30세경에 입교하여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세례받은 후 부인과 함께 홍살문 근처에 살면서 성사를 보기 위해 서울로 모여드는 교우들을 돌보아 주었다. 가난과 병고로 14자녀를 모두 잃으면서도 남을 위해 봉사하며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타인의 밀고로 부인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형조로 이송되어 형벌과 형관의 감언이설로 결국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그러나 석방되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배교를 뉘우치면서 다시 형조에 달려가 배교한 것을 취소하고 죽기를 원하였다. 여러 차례 형조로 찾아가 자신이 교우임을 떳떳이 밝혔으나 형조의 문지기는 이를 거절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굽히지 않고 있다가 형조판서가 다니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형조판서에게 직접 교우임을 밝히면서 다시 5월 12일에 체포되었다. 처음 그의 배교는 신자들을 슬프게 만들었고 격분시켰지만 그의 회개와 순교는 더 큰 기쁨이 되었다. 정 쁠로따시오는 자기가 처음 배교하였던 그곳에서 곤장 25대를 맞고 41세로 순교하였다.

 


 

 

 

성녀 아가다 김아기는 비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미신을 지키는 외교인과 결혼하여 신앙을 모르고 살아오던 중 친정 언니의 열심한 권면으로 미신을 떨치고 교리를 받게 되었다. 기억력이 나빠 12단(十二端) 기도문도 외지 못했지만 믿음의 정신이 지극하여 어떻게 하든지 주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자세로 열심히 살았다. 그러던 중 1836년 10월 김업이, 한아기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감춘 죄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포장이 천주교 믿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물었을 때 차라리 죽을지언정 배교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영세를 받지 않았으나 3년간의 극심한 고통으로 가득찬 옥중생활 속에서 교리를 배워 대세를 받고, 52세로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로 순교하여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성녀 안나 박아기朴阿기는 강원도 강촌 출신으로 서울 한강변에 살면서 모친과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기억력이 둔하여 교리문답과 기도문 배우기가 매우 힘들었으나 하느님을 사랑하여 매일 열심히 기도하였다. 그는 "나는 천주를 내가 원하는 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마음껏 사랑하기로 힘쓰겠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한다. 18세 때 교우인 태문행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3녀를 두어 그 자녀들을 매우 열심으로 키웠다. 특히 성녀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특별한 신심이 있어 주님의 오상을 생각하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839년 2월에 전가족이 함께 체포되었는데 포청에서의 혹형과 고문으로 남편과 자식들은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혼자 배교를 거부하고 어려움을 이겨냈다. 연일 계속되는 혹형으로 살이 찢어지고 뼈가 튀어 나왔지만 고통을 참아내면서 함께 갇힌 교우들을 위로하며 때때로 위문 오는 가족들에게는 잊지 않고 권면하였다고 한다. 1839년 5월 24일 56세에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 치명하였다.

 


   

 

성녀 아가다 이소사는 성 베드로 이호영의 누나로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다. 17세에 결혼했지만 남편이 죽자 친정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입교하였다. 부친이 대세를 받고 사망한 후 얼마 안 되는 가산마저 다 쓰고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동생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였다. 이소사는 가난한 생활 중에서도 언제나 화평한 기색과 웃음을 잃지 않아 주위의 모범된 교우였다. 1836년 2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동생 이호영과 함께 체포되어 형리들에게 몽둥이로 혹독한 매질을 당해 온몸이 터져서 유혈이 낭자하였으나 그의 용기는 꺾이지 아니하였다. 포청에서 동생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형집행의 연기로 3년 이상 고통스러운 옥중생활을 하였다. 동생과 함께 한날 한시에 순교하자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던 중 동생이 먼저 순교하게 되었다. 1839년 5월 24일 달구지에 다른 신자들과 함께 태워져 포청을 떠나 서소문밖 형장으로 가는 도중에도 온화한 기색을 잃지 않았으며, 달구지에서 내려 십자성호를 긋고 칼을 받아 55세로 순교의 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갔다.

 


  

 

성녀 막달레나 김업이金業伊는 어려서부터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처녀때 동정을 지키려고 하였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교우 청년과 결혼하였다. 중년에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노모를 모시면서 망건을 만들어 생계를 꾸려나갔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일하고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몇몇 교우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836년 10월 교회서적을 숨겨두었다는 죄로 김아기, 한아기 등과 함께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조금의 굽힘도 없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후 형집행이 연기되어 3년을 옥살이 하였다. 사서邪書를 읽고 마술 그림을 가지고 사도邪道를 봉행하면서 전한다는 죄목을 덧붙여서 사형선고를 받고, 1839년 5월 24일 65세로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여 천상 복락을 얻게 되었다.

 

 

 

 

성 아우구스띠노 이광헌은 일명 치문이라고 불리며 성녀 권희의 남편이고, 이 아가다의 아버지, 이광렬의 형이다. 신유박해때 여러 순교자를 낸 광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청년시절에는 매우 방탕한 생활을 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다. 30세 때 천주교를 믿게 되어 과거를 뉘우치면서 속죄의 마음으로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고 그로 인해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가산을 다 잃고 순교할 때까지 10여년을 가난하게 살면서 냉담자를 권면하고 병약자를 정성으로 돌보며 비신자들에게 전교하는 한편 성직자들을 보좌하면서 회장직에 충실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될 때 어떤 예비교우가 체포된 자기 아내를 석방시키기 위해 이광헌을 포함한 53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밀고하여 가족들이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신문을 마친 후 형조로 이송되었고, 가족 석방이라는 유혹으로 배교를 강요당하자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악한 표양을 보일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세 차례의 혹형을 받아 다리가 부러지고 살이 터져 온몸이 피로 물들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5월 24일 52세로 남명혁을 비롯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여 피로 물든 육체를 벗어나 그 영혼은 순교의 빛으로 영원한 찬란함 속에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성녀 한아기韓阿는 서울 열심한 교우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웠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세속 일에 마음이 쏠려 모친의 권면을 무시하고 외교인과 결혼하였다. 그러던 중 김업이 막달레나를 만나 회두를 권고 받았다. 이것이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총의 순간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곧 회개하였고 다시 교리를 배우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른 덕을 닦았다. 30세가 되던 해 남편과 세 자녀를 모두 잃고 친정으로 돌아와 더욱 깊은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사람의 영혼을 구하려는 열정이 불타올라 외교인들에게 교리를 전하고 죽어가는 이들에게 세례를 주며 죄인들을 회개하도록 권면하였다. 1836년 10월 김업이, 김아기 등과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고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며 3년간의 옥살이를 한 다음 1839년 5월 24일 47세로 서소문 밖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녀 루시아 박희순은 성녀 박큰아기의 동생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뛰어난 미모와 재주로 인해 궁녀로 뽑혔는데, 순진하고 총명하여 누구에게나 칭찬을 받았다. 15세경 어린 순조純祖의 유혹을 용기와 덕으로 물리쳐 그 명성이 세간에 널리 퍼졌었고 30세쯤 되었을 때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하였다. 궁중에 매인 몸으로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려워 마침내 병을 핑계 삼아 궁중에서 나왔지만 아버지가 천주교를 매우 싫어하였기 때문에 조카의 집에 머무르면서 신앙생활에 몰두하였고 아울러 언니 박큰아기와 조카의 식구들을 권면하여 입교시켰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천주교인으로 밀고되자 조카의 가족들과 함께 전경협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4월 15일 박해를 피할 방도를 의논하고 있을 때 포졸들이 급습하여 체포되었다. 형조로 이송되어 곤장 30대를 맞았고 다리가 으스러지면서 골수가 흐르는 만신창이의 몸이 되었지만 이제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고통이 어떠했겠는지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고 하면서 교우들에게 감동적인 권면 편지를 써 보내기도 하였다.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처지임에도 신앙의 고통을 스스로 안고서 모든 유혹과 형벌과 고문을 참아낸 후 5월 24일 38세의 나이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 다미아노 남명혁은 일명 문화라고 하고 성녀 이연희의 남편으로 서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젊을 때에는 난봉꾼들과 어울려 난폭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지만 30세경 입교하여 생활이 완전히 달라졌고 유방제 신부로부터 세례성사를 받고는 더욱더 열심하여 이광헌과 함께 회장으로 임명되어 예비자를 가르치면서 성직자를 보필하는 일과 교회내 신심운동을 일으키는 등 힘을 기울여 노력하였다. 친구 한 사람이 그에게 "저 세상에서 자네 이름을 무어라 부를 건가?"하고 물으니 "천주님을 위해 순교한 성의회聖衣會의 남 다미아노라고 불러주면 원이 없겠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1839년 예비교우의 밀고로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고 집에 숨겨둔 제의와 경본 및 주교관이 발견되어 서양신부를 체포하기에 혈안이 된 포청과 형조의 관헌들에게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다. 이러한 어려움을 참아내면서 아내 이연희에게 "이 세상은 잡시 머무르는 곳일 뿐 우리의 본고향은 천국이니 주님을 위해 죽어서 광명한 곳에서 다시 만나기를 바라오"라는 격려 편지를 써보낸 후 5월 24일 37세로 서소문밖 형장에서 이광헌을 포함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성 베드로 권득인은 일명 성도라 하였고 태중교우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16세 때는 모친마저 여윈 후 곧 결혼하여 형으로부터 분가하면서 성패聖牌와 성물聖物을 만들어 팔며 가난하게 살아갔다. 매우 열심하여 새벽닭이 울 때 일어나 날이 밝을 때까지 기도하기도 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였다. 1839년 1월에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면서, 배교하여 석방된 가족들에게 순교를 권하는 편지를 써 보내기도 했다. 성인의 굽히지 않는 신심과 용기는 포장과의 대화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어찌하여 천주교를 믿는냐"는 포장의 말에 "천주는 천사와 사람과 만물의 임금이시요,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며 이 모든 물건을 사용하고 하느님께 무한한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감사할 생각을 두지 않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습니까?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다 천주를 공경하고 섬길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성인은 5개월 동안의 굶주림과 추위의 옥중생활을 이겨내고 5월 24일 34세의 나이로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요셉 장성집은 서울에서 태어나 한강변 서강西江에서 살았고 한약방에서 일을 하며 두번 결혼하였으나 두 번 다 아내를 잃었다. 30세경 천주교를 알기 시작하여 열심한 예비교우로 살았다. 그러나 몇 가지 교리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져 확신을 얻지 못하게 되자 천주교 연구를 그만두고 재산 모으는 일에 몰두하며 세속적인 향락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신자 친구들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다시 신앙생활로 돌아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보속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참회의 생활이 대단하여 자기 방에 들어 앉아 추위와 굶주림을 참아가면서 기도와 성서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의 부모는 이러한 성인의 모습을 보고 "예전처럼 자유롭게 드나들며 생활하는 것이 너의 신앙생활에 무엇 그렇게 방해되겠느냐?"하고 걱정했으나 "제가 지은 죄는 모두 의식衣食을 넉넉히 하려는 욕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시 그런 죄를 짓는 것보다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는 것이 더 낫습니다"라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1838년 4월에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았고, 많은 신자들이 박해때 고문과 죽음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는 말을 듣고 뜨거운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을 만큼 은총의 힘을 느꼈다. 순교할 의도로 자수하려고 하였지만 대부의 만류로 자수하지 않고 있다가 1839년 4월 5일에 체포되었다. 체포될 때 중병상태여서 포졸들이 가마에 태우려 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포청까지 걸어갔다. 포청에서도 형관들에게 맑은 정신으로 자세히 교리를 설명한 후 혹형과 고문을 이겨냈다. 53세인 5월 26일 치도곤 20대를 맞고 장사杖死 순교하였다.

 

 

 

 

 

성녀 김 바르바라는 가난한 시골 가정에서 태어나 13세경 서울 황마리아 교우집의 식모로 들어가 교리를 배워 세례성사를 받았다.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지만 혼기가 되자 부모의 강요로 외교인과 결혼하여 남매를 낳았다. 바르바라는 남편을 입교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결혼한 지 15년만에 남편이 사망하자 딸 하나만을 데리고 살면서 신앙생활에 더 깊이 전념하였다. 1839년 3월경에 집주인과 함께 체포되었다. 바르바라는 배교를 거부하고 다른 교우들을 대라는 포장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자 포장은 혹독한 형벌과 고문으로 그의 육체를 짓이겼다. 하지만 강직한 성격을 가진 바르바라는 주저함이 없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이로부터 석달 동안의 옥살이 끝에 굶주림과 열병을 이기지 못하고 감옥 마루바닥에 누워 5월 27일 3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어 하늘로 올라갔다.

 


 

 

 

성녀 이 바르바라는 성녀 이정희, 이영희의 조카로 독실한 교우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서울 청파동에서 자랐다. 어려서 부모를 여읜 후로는 두 고모 이영희 막달레나, 이정희 바르바라에게 의지하고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15세의 어린 나이로 두 고모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도청에서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자 형조로 옮겨졌고, 형조판서는 배교시키기 위해 때로는 무서운 말로 때로는 부드럽게 달래기도 하였지만 용렬한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을 굽히지 않았다. 형조판서는 15세 어린 소녀를 형조에서 처단하기가 무리하다는 것을 느끼고 포도청으로 되돌려 보냈다. 포도청에서 더 심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지만 꿋꿋이 참아내었고, 그러던 중 5월 27일 기갈과 염병 그리고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하여 천상의 보금자리에 들게 되었다. 어린 나이로 순교한 것은 마음 아프지만 신앙적으로 볼 때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오직 천주를 사랑하다가 천국에 오르기 위해 잠시 세상에 태어난 간선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녀 로사 김노사金老沙는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결혼하였고 과부가 된 다음에 입교하여 열심히 수계하고 본분을 철저히 지켰다. 특히 그는 신앙의 보배를 얻은 것에 대하여 대단히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 특히 그중에서도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그 보배를 나누어 주고자 열심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38년 12월에 권득인 일가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여러가지 형구形具를 내보이면서 배교를 강요하였을 때 "천주님은 신인만물神人萬物의 대주大主이시라 결코 배반할 수 없습니다. 다른 교우들을 알려주는 것은 사람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에 말 못합니다"라고 하여 여러 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당하였다. 결국 7월 20일 55세에 서소문밖 형장에서 7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로 순교하였다.

 


 

 

 

성녀 마르타 김성임은 경기도 부평에서 태어났으며 결혼에 실패한 후 상경하였다. 장님 점장이와 재혼하여 살던 중 천주교를 알게 되어 계명을 지키며 살다가 남편이 죽자 살아갈 방도가 없어서 교우집을 전전하며 천한 일과 궂은 일을 하는 가운데 인내와 극기로 신앙심을 더욱 키워나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이매임의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순교를 결심, 4월 11일에 함께 살고 있던 이매임, 허계임, 이정희, 이영희, 김누시아 등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졸이 믿지 않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을 때 묵주를 보여주면서 천주교 신자임을 확인시키자 곧 결박지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포청에서 5차례의 주뢰형을 받아 다리와 팔을 쓰지 못했으나 견뎌냈고 형조에서 다시 한차례의 형문을 이겨낸 뒤 7월 20일 49세에 서소문밖 형장에서 7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여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품으로 갔다.

 


 

 

성녀 데레사 이매임은 성녀 허계임의 시누이이며 성녀 이정희, 이영희 자매의 고모로서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결혼하였으나 20세에 과부가 되었다. 친정인 봉천동으로 돌아온 후 같은 동네에 사는 여교우의 전도로 천주교를 알고 입교하였다. 입교한 다음 친정 식구들을 가르치고 권면으로 신앙을 인도하였으며 조카되는 이영희가 혼기에 이르러 동정생활을 결심하고는 혼담을 피해 상경하자 함께 따라가 살면서 신앙생활에 더욱 열심하였다. 1839년 4월 함께 살고 있던 이정희, 이영희, 김루시아, 김성임 그리고 성사를 보기위해 상경한 허계임 등과 순교를 결심하고 함께 남명혁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을 찾아가서 자신들이 천주교인임을 밝혔다. 포졸들이 이 사실에 어이없어 하며 믿지 않자 묵주를 꺼내 보이며 재차 천주교인임을 확인시켰다. 결국 이들은 결박 지어져 포청과 형조에서 심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으며 7월 20일 51세의 나이에 서소문밖 형장에서 7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녀 안나 김장금金長金은 태중교우로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생활을 했었다. 중년에 남편을 잃고 친정노모와 살면서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에 매진하였다. 이웃에 사는 이광렬의 가족과 화목하게 지내 그 평판이 교우들 사이에 널리 퍼졌으며 주위의 모범된 생활을 하였다. 1839년 4월 7일 이광렬 일가와 함께 체포되었고 갖은 고문과 혹형을 이겨내고 7월 20일 50세로 서소문밖 형장에서 다른 교우 7명과 함께 참수로 순교하여 두 팔을 벌리고 웃으시는 주님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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