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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성인.성녀

[스크랩] 한국 103위 순교성인 81-103위

 

제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고 내 뒤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내게 마땅하지 않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마태 10,38-39. 16,25).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 누가 자기 친구들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것,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명하는 것을 여러분이 행하면 여러분은 나의 친구들입니다(요한 15,12-14).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성 시메온 베르뇌Berneux, Francois 주교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1837년에 신부가 되어 2년 후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1841년 베트남 통킹에 도착하여 전교하다가 체포되어 2년간 옥살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에서 12년 동안 전교하였다. 1854년 12월에 주교로 성성되었고 이듬해 제4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856년에 입국하였다. 경향 각처를 숨어 다니며 선교하면서 베론에 신학교를 세우고 서울에 2개의 인쇄소를 차리는 등 10년 동안 조선교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1866년 2월 23일 서울 홍봉주의 집에 거쳐하던 중 하인 이선이의 고발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3월 7일 52세로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였다.

 


 

 

 

성 유스티노 브르트니에르Breteni res, Simon Marie Antoine Just Ranfer de 신부는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 중 유일한 귀족의 후손으로 1838년 프랑스 디종에서 태어났다. 1861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1864년 신부가 되어 도리 신부, 위앵 신부와 함께 베르뇌 주교의 요청에 의해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65년 5월에 충청도 내포를 통하여 입국, 서울의 정의배 회장 집에 머무르면서 정 회장에게서 한국어와 풍습 등을 배웠다.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 1866년 2월 25일에 체포되었고, 3월 7일 28세로 새남터에서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헨리꼬 도리Dorie, Pierre Henri 신부는 동료들로부터 꼬마 또는 방데지방의 작은 꽃이라 불리었는데 1839년 9월 23일, 즉 순교자 앵베르 모방 샤스땅 사제 등이 조선에서 순교한 다음다음날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1864년 5월 21일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후 즉시 모국을 떠나 동료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였다. 경기도 용인의 손골에 배속되어 이군옥의 집에서 기거하며 사제로서 전교 활동을 하던 중 새해를 맞아 볼례 신부와 함께 상경하여 베르뇌 주교댁에 과세하고 다시 내려갔다가 1866년 2월 27일에 체포되어 3월 7일 27세로 새남터에서 베르뇌 주교와 다른 동료 신부 2명과 함께 군문효수로 순교하였다.

 


 

  

 

성 루이 볼리외Beaulieu, Bernard Louis 신부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1862년 부제품을 받은 후 이듬해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고, 1864년 사제서품을 받음과 동시에 한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1865년 다른 동료 신부들과 함께 입국하였다. 1866년 2월경 볼례 신부는 서울에서 몇십 리 떨어진 광주의 묘론리에 머물고 있으면서 고해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조선말을 배우고 공주지방에 배속되었으나 임지에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하기 전에 박해를 받았다.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광주 근처 교우집에 피신해 있던 중 1866년 2월 27일 체포되었다. 3월 7일 26세로 새남터에서 베르뇌 주교와 다른 동료 신부 2명과 함께 군문효수로 순교하였다.

 


 

 

 

성 요한 남종삼은 충주지방에서 태어났으며 22세 때인 1838년 문과에 급제하여 철종 때에는 승지가 되었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신앙생활을 해왔으나 나라의 공식적인 의식이 있을 때는 교리에 지나친 조상 숭배행위에 참여해야 하였으므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한때 가문의 생계를 꾸려야하는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관직을 떠나 가정으로 돌아와 신앙생활에 열중하며 외국신부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1863년에 생활의 궁핍으로 다시 승지의 관직에 일하게 되었는데 1864년 이후 국경을 넘나드는 러시아 선박 문제로 대원군 부인 민씨는 조선에 와 있는 프랑스 선교사에게 이일을 의뢰하기 위해 남 요한을 부르기도 하였다. 천주교를 반대하던 대신들이 박해를 탄원하자 1866년 천주교 박해령이 내렸고 남요한 역시 체포되었다. 의금부에 마련된 국청에서 6차에 걸쳐 베르뇌 주교, 다블뤼 부주교 등 다른 교우들과 함께 엄중 문초를 당하였다. 1866년 3월 7일 49세로 서소문밖 네거리에서 홍봉주와 같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 요한 전장운은 일명 승연으로 서울에서 태중교우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농사와 분상粉商으로 어려운 생계를 꾸려나갔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혹형을 이겨내지 못하고 배교하여 풀려나왔다. 이러한 일로 늘 양심의 가책을 받아오던 중 어머니의 권면으로 배교한 죄를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신부의 입국을 기다리면서 통회의 기도를 바쳤다.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입국하자 고해성사를 받고 열심히 살아 모범을 보이는 한편 결혼하여 슬하에 3남매를 두고 가족과 함께 더욱더 믿음의 생활에 열중하였다. 1866년초 베르뇌 주교의 명에 의해 교회서적 출판에 참여하게 되어 최형과 임치하를 도와 판각板刻 장만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곧 박해가 일어나 주교와 신부들이 체포되면서 많은 교회서적들이 발각되자 이로 인해 3월 1일 체포되었다. 포청과 의금부에서 심문과 형문을 받고 갖은 고초를 당하였으며 3월 6일 형조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3일 뒤인 9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날로 최형과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55세의 나이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성 베드로 최형은 일명 치장으로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나 서울 남문 밖에서 살았다. 14세 때 입교하였으며 동생 최방제는 김대건, 최양업과 함께 마카오에 유학하여 그 곳에서 병사하였고, 형 최수는 1866년 절두산에서 참수하였으며, 큰누이는 평생을 동정으로 살았다. 이러한 독실한 교우가정에서 성장한 최형은 1836년 모방신부의 복사로 여러 해 동안 신부를 보필하며 전교에 힘썼다. 그후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로는 목수일을 하며 묵주 만드는 일과 교회서적 간행을 도왔다. 베르뇌 주교의 입국 후에는 교회서적 출판의 책임자가 되어 교회서적 출판에 크게 공헌하였다. 1866년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면서 적발된 많은 교회서적들 때문에 체포되어 3월 9일 52세로 서소문밖 형장에서 동료 전장운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최형 성인의 사형선고문에는 "혹심한 곤장에도 굴하지 않고 쇠나 돌같이 고집이 세어 사교邪敎를 단념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또 진리를 고백하면서 사형선고문에 직접 서명까지 하였으니 이에 국법을 따라 마땅히 사형에 처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성 마르코 정의배는 서울 창동에서 태어났으며 유업儒業을 쌓으면서 살아오던 중 1839년 기해박해 때 프랑스 신부들의 순교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감동하여 그 즉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후 열심한 신앙생활로 인해 1845년 페레올 주교가 입국하자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할 때까지 20여년을 헌신적으로 교회일을 하였다. 1854년 성영회(聖瓔會, 버림받은 아동들을 위한 구제사업기관- 우리나라 최초의 고아사업 기관)가 조직되자 성영회를 맡아 고아들을 돌보았으며 깊은 학식과 살아있는 신앙심에 모두들 탄복하였다고 한다. 1866년 2월 베르뇌 주교가 체포된 후 주교의 하인 이선이의 밀고로 체포되어 3월 11일 71세로 두 프랑스 신부와 우세영과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알렉시오 우세영은 일명 세필로 황해도 서흥의 향교골에서 태어나 총명한 재주로 18세 때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우연히 만난 김기호 회장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관직에 뜻을 버리고 입교했다. 서울로 올라와 정의배 회장에게 교리를 배우고 베르뇌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후 고향으로 돌아와 천주교를 반대하던 부모와 가족들을 인내와 열정으로 권면하여 입교시킨 다음, 보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평안도 논재로 이사, 가족과 함께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 2월 16일 이웃마을인 고둔리 공소에서 축일을 지내다가 유정률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었는데 평양감영에서의 혹형을 이겨내지 못하고 배교하였다. 석방되자 배교한 것을 크게 뉘우치고 스승 정의배를 만나기 위해 상경하였다가 정의배의 집을 지키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3월 11일 21세의 나이로 프랑스 신부 두분과 정의배와 함께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였다.

 

 

 

 

 

성 안토니오 다블뤼Daveluy, Marie Antoine Nicolas 주교는 파리 외방선교회원으로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1841년 2월에 고국을 떠나 1844년 9월말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의 요청으로 조선선교사로 임명되어 1845년 10월 12일 강경포에 입국, 21년 동안 조선의 선교사로 활약하였다. 교황청으로부터 성모무염시태를 조선교회의 새 주보로 받았고 성모성심회를 창설하여 성모로부터 받은 은혜를 감사하였다. 그의 업적 중 기억할 만한 것은 한한불자전漢韓佛字典과 한국천주교회사 및 조선순교사의 편찬으로, 스스로 조사 발굴한 많은 순교 자료들이 파리 수도회 본부로 보내어져 후일 달레Dallet의 유명한 한국천주교회사가 저술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충청도와 경상도를 다니면서 전교하던 중 체포되어 충청도 보령의 수영으로 압송되었고 보령 바닷가 갈매못에서 3월 30일 군문효수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 마르티노 루가 위앵Huin, Martin Luc 신부는 프랑스 기용벨에서 태어났다. 1861년에 랑그르교구 소속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어 2년 동안 보좌신부로 있다가 1863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했다. 이듬해 조선선교사로 임명되어 도리 신부, 볼리외 신부와 함께 중국을 거쳐 1865년 5월 27일 충청도 내포를 통해 조선에 입국하였다. 다블위 주교에게 조선어를 배운 후 충청도 지방에서 전교하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3월 11일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자 오메트르 신부와 함께 자수하였다. 그해 3월 30일 충청도 보령 갈매못에서 다블위 주교와 오메트르 신부 그리고 장주기, 황석두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고 30세로 순교하였다.

 


 

 

 

성 베드로 오메트르Pierre, Aumaitre 신부는 프랑스 앙굴램 교구의 에적Aizecq에서 태어났다. 1862년 파리외방선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6월 14일 서품되어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63년 입국하여 수원 근방 샘골泉谷里에서 조선어를 익히고, 다블위 주교가 전교하고 있던 충청도 지방으로 내려가 전교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다블위 주교가 체포되자 체포되신 분들의 고문을 피하도록 위앵 신부와 함께 자수하였다. 3월 30일 충청도 보령의 갈매못에서 다블위 주교, 위앵 신부, 장주기, 황석두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아 29세의 나이에 순교하였다.

 


 

 

 

성 요셉 장주기張周基는 경기도 수원의 느지지에서 태어났다. 1826년 세례로 입교한 후 친척들의 반대와 박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여 회장직을 맡아보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게 하는 한편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토지의 농사일과 잔일을 맡아 어서 빨리 훌륭한 신부가 많이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면서 봉사하였다. 1866년 3월 1일 포졸들이 배론신학교를 습격하여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를 체포하자 제천 근처의 노럴골로 피신했으나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자수하였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3월 30일 63세로 충남 보령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황석두 등과 함께 군문효수로 순교하였다.

 


 

 

 

성 황석두 루가, 나이: 53세,  순교장소: 갈매못, 형벌: 군문효수  

 


 

 

 

성 토마스 손자선은 충청도 홍주 거더리 마을 부유한 농가이자 3대째 천주교를 신봉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매일의 기도생활과 생업에 충실하였으며 주위에서는 그의 규칙적인 생활과 좋은 행실을 칭찬하였다. 1866년 3월 거더리에서 다블뤼 주교가 체포될 때 관인들은 천주교인들의 집을 뒤져 돈과 물품을 약탈해 갔다. 덕산 관아에서는 주교를 체포한 후 더 많은 신자들을 체포하고자 꾀를 내어 관인들이 약탈해간 돈과 물건을 찾아가라는 기별을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어렵게 살고 있는 교우들을 위해 혼자서 그 물건들을 찾으러 갔다가 체포되었다. 관아에서는 그에게 배교를 강요하며 재물과 신변보호로 유혹을 했지만 단연코 거부하였다. 또한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해미로 이송되었고, 해미에서 두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고문을 당했으나 배교하지 않았다. 결국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5월 18일 공주옥에서 교수형을 받아 22세로 순교하였다.

 


 

 

 

성 바르톨로메오 정문호는 충청도 임천에서 양반으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많이 하여 고을원님까지 지냈고 학식과 교양을 겸비한 분으로 영세한 다음부터는 모든 관직을 버렸다. 품행이 단정하고 성격이 강직하여 교우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박해를 피해 고향을 버리고 여러 지방을 유랑하며 살다가 병인박해 때에는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살고 있었다. 1866년 12월초 사람들을 시켜 박해에 대한 전주 감영의 동태를 살피러 보냈으나 그 소식을 듣기도 전에 12월 5일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한재권, 손선지 등과 함께 체포되어 12월 13일 65세로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하기 직전 옥중에서 기도로써 순교를 예비했고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오늘은 우리가 천국으로 과거보러 가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기뻐해야 할 날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성 베드로 조화서는 최양업 신부의 복사이며 성인 조윤호의 아버지로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1839년 기해박해 때 부친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충청도 신창으로 이사하여 한 막달레나와 결혼, 아들 윤호를 두었고 이때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 지냈다. 그후 1864년 다시 전주의 성지동으로 이사하였으며 얼마 후 아내가 사망하자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12월 5일 성지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이명서, 정원지, 아들 윤호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아들과 함께 순교를 각오하고 여러 차례 신문을 당했는데 후손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하는 체하며 배교를 권유하는 관장의 유혹을 받았으나 이를 물리치고 오히려 아들에게 믿음을 지키라고 격려했다. 그러던 그해 12월 13일 모든 유혹과 고문을 이겨낸 조 베드로는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성지동과 대성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51세로 순교하였다. 아들 윤호도 10일 후인 12월 23일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여 3대가 순교하였다.

 


 

 

 

성 베드로 손선지는 일명 승운으로 충청도 임천의 괴인돌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입교한 후로 열심히 수계했고, 샤스탕 신부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할 때까지 회장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살면서 자신의 집을 공소로 상용하고 있었는데, 그해 12월 5일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정문호, 한재권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에서의 신문 중 회장임이 탄로나 공소를 거쳐간 서양신부와 교회서적의 출처를 알려는 관헌들에게 잔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옥중에서도 회장의 직무를 다하였으며 함께 갇힌 교우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12월 1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대성동과 성지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46세에 순교하였다.

 


 

 

 

성 베드로 이명서는 일명 재덕으로 충청도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신앙문제로 고향을 등지고 여러 지방을 유랑하며 살았다.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몇 해 전에 전주 부근의 교우촌인 성지동에 정착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확산되자 전라도 지방에서는 교우촌인 성지동과 대성동이 제일 먼저 피해를 입게 되어 12월 5일 성지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조화서 조윤호 부자, 정원지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되기 전 중병에 걸려 조화서가 여러 번 피신을 권유하였으나 이를 뿌리치고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에서는 중병에 있는 이명서를 배교시키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여 제일 먼저 신문하고 혹형과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했다. 그러나 내가 몇 번 죽는 한이 있어도 하느님을 버릴 수 없습니다"하고 모든 고통을 이겨내면서 함께 체포된 교우들과 함께 기도로써 순교를 준비하였다. 12월 13일 45세로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대성동과 성지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요셉 한재권은 충청도 진잠에서 태중교우로 내어났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착한 모범을 따라 열심히 살았으며 진잠지방에서는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박해를 피해 전주 대성동으로 이사한 후로는 아무런 직책 없이 헌신적으로 교회일을 도우면서 모범이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전라도 지방에까지 미치게 되어 이해 12월 5일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정문호, 손선지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부친이 친구를 통하여 석방 교섭을 벌이는 한편 옥까지 찾아와 배교할 것을 간청하였지만 "배교란 말은 부당합니다. 아버님이 아무리 그러셔도 소용없습니다"하고 말하면서 거절하였다. 12월 13일 31세의 나이로 5명의 교우와 함께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베드로 정원지는 일명 원조로 충청도 진잠에서 태중교우로 태어나 전주 부근의 수널마루에서 살다가 금구 지방으로 이사했고, 1866년 병인박해 당시에는 전주 성지동 조화서의 집에 셋방을 얻어 노모老母, 형,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1866년 12월 5일 포졸들이 성지동 조화서 집을 습격할 때 산에 피신해 있었으나 동정을 살피러 내려왔다가 조화서 일행을 체포해 가는 포졸들에게 잡혀 전주 감영으로 끌려갔다. 옥안에서 지극한 효성으로 노모를 생각하며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으나 함께 갇힌 교우들의 위로와 권면으로 눈물을 거두었고 혹형과 고문도 이겨냈다. 12월 13일 가족들에게 "우리는 천국에서 만날 것입니다. 그러니 제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라는 위로의 편지를 남기고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성지동과 대성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20세에 순교하였다.

 


 

 

 

성 요셉 조윤호는 성인 조화서의 아들로 충청도 신창에서 태중교우로 태어났으며 1864년 부친을 따라 전주 근처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한 후 교우 처녀 이 루시아와 결혼하였다. 그는 보기 드물게 착실하고 품행이 바르며 교우 본분을 충실히 지키는 열심한 교우로 모범이 되었다. 1866년 12월 5일 성지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부친, 정원지, 이명서 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부친과 6, 7차의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부친이 형장으로 나가자 감옥 속에서 "아버님은 오늘 영복소에 가시는군요. 거기 가시거든 저를 잊지 마세요"라고 전했다. 부친이 순교한지 10일 후인 12월 23일 전주에서 최후로 곤장 16대를 맞은 후 형리들의 교살로 순교하였다(18세). 이로써 3대로 이어지는 순교자 가문이 되었다.

 


 

 

 

성 요한 이윤일은 일명 제헌으로 충청도 홍주에서 열심한 교우 집안에서 태어나 경상도 문경의 여호목골에 살며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의 여파가 경상도 지역에까지 미치게 되어 그해 11월 가족들과 마을 교우 30여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문경관아에서 3일 동안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배교하지 않은 교우들과 함께 상주로 이송되었다. 상주에서 한달에 세 번씩 석달동안 9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다시 김회장 형제와 함께 사학의 두목으로 지목되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43세가 되던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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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phjyoh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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