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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성인.성녀

[스크랩] 한국 103위 순교성인 21-40위

 

제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고 내 뒤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내게 마땅하지 않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마태 10,38-39. 16,25).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 누가 자기 친구들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는 것, 그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명하는 것을 여러분이 행하면 여러분은 나의 친구들입니다(요한 15,12-14).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다는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성 요한 이광렬은 일명 경삼으로 성인 이광헌의 동생이며 명문양반인 광주이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22세때 형 이광헌 일가와 함께 입교하였으며 교회의 여러 가지 일에 헌신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던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등을 도와 두 차례나 북경을 왕래하였고, 북경에서 성세를 받고 귀국한 후에는 고기를 전혀 먹지 않으면서 희생과 절제의 생활을 하였다. 그의 정신 수련은 비상하여 세속의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인내와 극기의 동정童貞생활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갔다. 1839년 4월 7일에 형의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형과 함께 매우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표명하며 언제까지나 그것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단언하였다. 5월 24일 성인 이광헌과 함께 참수당할 것이었으나 당시 조선의 법에는 두 형제를 한때에 죽이는 것을 금하였기에 7월 20일 44세에 서소문 밖 형장에서 일곱 명의 다른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았다.

 


 

 

성녀 막달레나 이영희는 성녀 허계임의 딸이며 성녀 이정희의 동생으로 경기도 봉천奉天에서 가난한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과부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고모 이매임의 가르침을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입교하여 열심히 살았지만 완고한 아버지는 천주교를 반대하였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몰래하였다. 성장하면서 수정守貞을 결심하였고 집에서 혼인시키려고 준비하는 것을 보고, 호랑이에게 물려간 것처럼 위장하여 집을 떠나 고모인 이매임의 집으로 가서 함께 수계하며 살았다. 이미 순교한 교우들의 위대한 신앙정신과 어떤 고통도 이겨냈다는 말을 듣고 순교의 열의가 가득하던 중 고모와 언니 등 다른 교우들과 함께 1839년 4월에 포졸들에게 가서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에서 모두 7차의 신문과 형문을 당했으나 한결 같은 신앙으로 이를 이겨내고 7월 20일 30세에 서소문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동저의 몸으로 순교하였다.

 


 

 

 

성녀 루치아 김누시아金累時阿는 강원도 강촌江村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하였으며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9세 때 어머니로부터 천주교를 알게 되어 입교하였다. 14세 때 이미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하였으며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가산을 전부 팔아 장례를 치르고 자신을 받아주는 교우들의 집에서 잔심부름을 해주며 살았다. 1839년 4월에 함께 살고 있던 이매임, 이정희, 이영희, 김성임, 허계임 등과 순교할 마음으로 포졸들에게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에서 고문과 혹형을 받았으나 변함없는 신앙과 천진한 태도로 잘 이겨냈으며, 교리내용에 대한 심문 중에도 기막힌 비유와 논리정연한 대답으로 형관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천주를 보았느냐 하는 질문에 "시골에 사는 백성들이 임금님을 뵈옵지 않고서는 임금님이 계신 것을 믿을 수 없습니까?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을 보고 저는 그것들을 창조하신 대왕과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 것을 보면 그의 총명함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포장은 이들이 제 발로 자수하여 들어온 것을 더욱 괘씸히 여겨 다른 신자들보다 더 혹독한 형벌을 내렸지만 의연하게 참아냈으며 3개월 동안의 옥살이를 한 다음 7월 20일 21세의 나이에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녀 마리아 원귀임元貴任은 경기도 고양군 용머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거지처럼 되어 아버지를 따라 떠돌아다니며 살다가 9세 때 서울로 올라와 친척인 원 루시아 집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갔었다. 똑똑하고 온순했던 그는 15세 때에 세례를 받고서 동정을 지키겠다는 허원을 하여 머리를 얹은 후 결혼한 여자 행세를 하고 있었다. 1839년 2월 포졸들이 몰려왔을 때에 다행히 몸을 숨길 수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의 밀고로 결국 붙잡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잠시 당황하여 정신을 잃었으나, 이 세상에서는 주님의 뜻이 아닌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다시 마음의 평온을 되찾았다. 배교를 강요하는 형리에게 "내 영혼을 이미 천주께 맡긴지 오래니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배교하면 내 영혼을 영원히 잃게 됩니다" 라고 말하면서 배교를 거부하였다. 옥중에서 허기와 갈증 그리고 전염병까지 걸려 옥살이 넉달 동안의 고통은 매우 심하였다. 7월20일 21세의 나이에 서소문 밖 형장에서 7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성녀 마리아 박큰아기朴大阿兄는 성녀 박희순의 언니로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중년에 조카의 집에 살던 중 자유롭게 천주교를 봉행하기 위해 대궐을 나온 동생 박희순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입교하였고 열심히 수계하였다. 동생인 박희순의 덕행이 너무 뛰어나고 널리 알려져 있어서 크게 인정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평상시에 그리고 죽을 때에 훌륭한 신앙행위와 위대한 모범을 보여 주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동생의 주선으로 가족과 함께 궁녀 출신인 전경협의 집으로 피신했으나 4월 15일 전경협의 집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여러 가지 고문과 형을 받았지만 용맹히 이겨냈고, 9월3일 53세로 서소문밖 형장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성녀 바르바라 권희權喜는 성인 이광헌 회장의 부인이었고 본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17년경 외교인이던 남편 이광헌과 함께 입교하여 열심히 수계하였으며, 박해의 영향으로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회장의 직무를 맡은 남편을 도와 성직자들을 집에 맞아들여 교우들을 미사에 참여케 하고 강론을 듣게 하였다. 1839년 4월에 전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바르바라는 배교를 강박하는 수많은 형벌을 받았으며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어린 자녀들의 고통이었다. 12살밖에 안된 어린 아들이 고문을 당하는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며 천 갈래 만 갈래 마음이 찢어졌지만 끝내 모든 유혹과 형벌을 견뎌내면서 모성애의 뜨거운 고통을 순교정신이라는 맹렬한 불길 속에 태웠다. 형리들은 그의 아이들을 불러 부모가 배교하여 집에 돌아가 기다린다고 속였으나 오히려 아이들은 "저희 부모님이 배교하고 안하고는 그분들의 일입니다. 저희들은 저희들이 늘 섬겨온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여 형리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형리들은 아이들을 이용하여 바르바라의 배교를 요구하였다. 그렇지만 뼈를 부스러뜨리는 고통을 주님께 봉헌하면서 주님의 은총이 자녀들에게 항상 함께 하기를 빌 뿐이었다. 처참하고 괴로운 5개월 동안의 옥살이 끝에 9월 3일 45세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로 순교하였다. 자식을 위한 모성애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은총 안에서 일치시킨 모범을 보여준 성녀이다.

 


 

 

 

성 요한 박후재는 일병 명관으로 경기도 용인의 교우가정에서 태어났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부친 박 라우렌시오가 순교한 다음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가족을 데리고 서울 한강가에 살며 미투리를 팔아가며 생활하였다. 넉넉지 못한 생활 중에서도 곧곧한 마음을 가졌으며 뛰어난 덕행으로 교우들의 귀감이 되었고, 36세 되었을 때 교우 처녀인 박 안나와 결혼한 후에도 더욱더 깊은 신앙심으로 아내와 함께 열심히 살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아내를 피신시키고 5월에 체포되었다. 포처에서 치도곤 40도를 맞아 살이 찢어지고 뼈가 드러나 피가 낭자했으나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함께 옥에 갇힌 교우들을 격려하였고 흉악한 죄수들에게는 천주교의 바른 도리를 강론하였다. 형조로 이송되어 그곳에서도 갖은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드디어 9월 3일 40세로 서소문밖 형장에서 다른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녀 바르바라 이정희는 성녀 허계임의 딸이면서 성녀 이영희의 언니로 경기도 봉천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과부가 되어 집에 돌아온 고모 이매임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어머니, 동생과 함께 입교했다. 비신자인 아버지는 비신자와 결혼시키려 하였는데 그의 양심이 허락치 않아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3년 동안을 앉은뱅이 노릇을 했다. 결국 신자인 청년과 결혼하였지만 결혼 후 2년 만에 남편을 여의고 잠시 친정에 있다가 상경하여 고모와 동생과 함께 살면서 열심히 수계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고, 같은 해 4월초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여 순교를 결심한 후 당시 한집에 함께 살고 있던 이매임, 이영희, 김성임, 김루시아, 그리고 성사를 보러 상경한 어머니와 함께 4월 11일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했다. 그후 포청과 형조에서 여러 가지 고문과 혹형을 끝까지 이겨내고 9월 3일 40세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녀 마리아 이연희는 성인 남명혁의 부인으로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남명혁과 결혼한 후 28세경 남편과 함께 입교하였다. 입교한 다음 남편과 함께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회장의 직무를 맡은 남편을 도와 공소를 세웠다. 그 곳에서 예비자와 교우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며 성사 받도록 준비시키는 등 부지런하게 교회 일을 도왔다. 이 마리아는 의지가 굳고 지혜가 많은 부인으로 그의 얌전함과 착한 모범은 모든 이의 마음을 끌었다. 1839년 4월 7일에 전 가족이 함께 체포되었는데 그의 모정의 순교가 더욱 빛나고 있었음 다음에서 볼 수 있다. 12살된 어린 아들이 고문당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온 몸이 찢기는 듯한 모정의 아픔을 느꼈지만 주님을 향하여 "이것은 주님의 가장 크신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았다. 어떤 증인의 말에 의하면 그는 마음을 송두리째 바쳐 천주를 진실히 사랑하였고 그 영혼의 원은 오직 천국을 향하여 있었다고 한다. 남편을 따라 여러 차례 곤장을 맞고 주리를 틀리다가 12살된 아들을 남겨놓고 1839년 9월 3일 35세에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한국에는 여러 대를 내려오며 순교자를 낸 교우 집안이 여럿이 있다. 이는 충렬한 희생심이 혈통과 같이 대대손손 전해지기 때문이다. 성녀 아녜스 김효주는 성녀 김효임의 동생으로 서울 근교 밤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여읜 후 가족들과 함께 입교하여 언니인 김효임 골롬바, 동생인 글라라와 함께 수정守貞을 결심하고 기도와 덕행에 노력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해 4월에 이사해 살고 있던 경기도 고양 용머리에서 언니 김효임과 함께 체포되었다. 가혹한 형벌을 받았지만 한마디 소리 없이 침묵 속에서 기도하면서 참았다. 옷을 벗겨 공중에 매달아 번갈아 때리는 학춤이라는 형벌을 받기도 하였으며 남자 죄수들이 있는 감옥에까지 가두어졌으나 주님의 은총으로 큰 힘을 얻어 남자들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9월 3일 23세의 나이에 서소문 밖 형장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언니보다 20여일 먼저 순교하였다.

 


 

 

 

성 프란치스꼬 최경환은 두번재 한국인 사제인 최양업의 아버지로 충청도 홍주의 다래골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원래 교회 창설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왔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신앙인의 본분을 지켜왔다. 결혼한 다음에는 보다 열심한 신앙생활을 위하여 가족들과 상의한 끝에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 벙거지골이라는 마을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곳 외교인들의 탄압으로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 경기도 부평을 거쳐 과천의 수리산에 정착, 교우촌을 건설하고 오로지 신앙생활에만 몰두하였다. 1836년 큰 아들 최양업을 모방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성인의 신심은 자신의 성격에 많은 영향을 끼쳐 괄괄하고 불같은 성격을 믿음의 정신으로 많은 노력을 한 결과 주위 사람들은 그의 본래 성품이 온순한 것으로 알고 온화한 그의 성품에 탄복했었다 한다. 최양업 신부에 의하면 "아버지는 많은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깊은 묵상과 신심서적 읽기에 열성을 보여 교회의 가르침에 놀랄만한 지식을 취하셨다"며 "또한 아버지는 천주에 대한 열성과 한가지로 사람에 대한 박해심이 열렬하여 과일을 추수할 때가 되면 가장 좋은 것을 가난한 이웃을 위한 몫으로 남겨놓으셨다"고 전한다. 1839년 수리산공소 초대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곧이어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였으며 교우들을 위로 격려하면서 돌보아주던 중 그해 7월 31일에 서울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마을 교우들과 일가 등 40여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아들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어 신학 공부시킨다는 죄가 더 추가되어 남달리 혹심한 고통과 형벌을 받았다. 태장 340도, 곤장 110도를 맞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다. 그해 9월 11일 34세에 최후로 곤장 50도를 맞고 그 다음날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Imbert, Lurent Marie Joseph 주교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1819년 12월 18일 외방선교회의 신부가 되었고, 다음해 3월 20일 파리를 떠나 중국 사천교구로 가서 전교활동 중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1837년 12월 17일에 봉황성 변문에 도착, 그 다음날 조선 입국에 성공하여 조선 땅을 밟은 첫 주교가 되었다. 이미 입국한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와 함께 전교에 힘쓴 결과 1839년 초에는 9,000명이 넘는 천주교 신자로 교회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성직자 양성에 힘을 쏟아 세 소년을 유학 보냈고, 어른으로서 적임자를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치는 등 교회발전에 다각적인 노력을 하였다. 1839년 7월 3일 포졸 앞에 자수하였고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라는 극형으로 순교하여 이 땅의 복음화의 뿌리가 되어 주셨다. 서울대교구 신림 10동에 소재한 삼성산 성당에 가면 성인의 유품을 볼 수 있으며, 성당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삼성산 성지에서 주일미사 참여도 가능하다.

 


 

 

 

성 베드로 모방Maubant, Pierre Philibert 신부는 파리 외방선교회원으로 프랑스에서 태어나 1829년 5월 13일에 신부가 되었고, 1831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이듬해 중국 사천교구 선교사로 임명되어 마카오로 떠났다. 그러나 도중에 조선교구장 브위기에르 주교를 만나 조선선교사가 되기로 자원하였다. 1836년 1월 12일 조신철, 정하상 등의 인도로 입국, 파리 외방전교회원으로서 최초로 조선에 와서 조선말을 공부하며 경기도와 충청도 교우촌을 방문, 200여명에게 영세를 주었고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 세 소년을 뽑아 최초 신학생으로 마카오로 보는 등 많은 일을 하였다. 1839년 앵베르 주교의 권면으로 9월 6일 홍주 근처에서 대기 중인 포졸들에게 자수한 다음 9월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였다.

 


 

 

 

성 야고보 샤스탕Chastan, Jacques Honore 신부는 1803년 프랑스에서 태어나 1827년에 신부가 되어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 마타오에 도착했다. 조선으로 떠나는 브위기에르 주교에게 조선 포교지를 자원하였고, 1836년 12월 31일 정하상, 조신철, 이광렬의 안내로 변문을 통과하여 이듬해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각 지방 교회를 다니면서 상제옷을 입고 산길을 헤매었으며 음식과 일상생활에 대한 불편은 물론 밤새도록 성무 집행하는 고통을 다른 선교사와 같이 겪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후 이미 체포된 앵베르 주교는 박해가 확대되어 신자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선교사들의 자수를 권고하자 순명하여 모방 신부와 같이 자수하였다. 9월 21일 새남터에서 앵베를 주교, 모방 신부와 함께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밑거름이 되었다.

 


 

 

 

성 아우구스띠노 유진길은 소년 성인 유대철의 아버지로서 서울의 유명한 역관譯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특히 철학적, 종교적 사색을 즐겨하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만권의 책과 동서고금의 학문이 가슴에 가득한 인물이라고 일컬었다. 이처럼 진리를 향한 정신적인 갈망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던 그는 우연히 자기집 세간에 발려 있는 헌 종이에 영혼, 각혼, 생혼이라는 글자를 보고 그 내용이 "천주실의"라는 책의 일부분임을 알고 사방에 수소문 한 끝에 한 교우를 만나게 되어 교리를 터득한 후 곧 입교했다. 그 후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던 정하상을 만나게 되었으며 역관의 신분을 이용하여 북경교회와 연락하면서 자신도 성직자 영입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1824년 동지사冬至使의 수석 역관으로 북경에 가서 성세성사를 받고 북경교회의 연락을 담당, 1826년 교황에게 성직자 파견을 간청하는 편지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는 등 전후 8회에 걸쳐 북경을 왕래하면서 조선교회의 상황을 북경에 알렸다. 그 결과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었고, 1833년 중국인 유방제 신부, 그 뒤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앵베를 주교가 입국하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박해 초에는 정3풍 당상역관堂上譯官이라는 높은 지위와 권세가와의 친분으로 체포되지 않았으나 7월 17일에 체포되어 갖은 혹형과 고문을 받았다. 서양 신부가 숨어있는 곳을 대라는 요구에 박식한 그는 교리 설명과 함께 그들의 요구에는 함구하면서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주리형과 줄톱질형을 받는 형벌에서도 의연한 자세를 지켜 믿음의 위대함을 보여주었고, 국법을 어겨 매국노와 공모한 사학의 무리라는 죄목으로 1839년 9월 22일 48세로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녀 막달레나 허계임은 성녀 이정희, 이영희 자매의 모친으로 경기도 용인지방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남편 이씨는 완고한 외교인으로 천주교를 몹시 싫어하였으므로 남편 몰래 시누이 이매임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두 딸과 함께 입교하였다. 1839년 3월 성사를 받으러 서울로 가서 시누이와 두 딸이 사는 집에 머무르고 있던 중 남명혁과 이광헌의 어린 자녀들이 혹형과 고문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시누이와 두 딸 그리고 김성임과 김 루시아 등과 함께 순교를 결심한 뒤 4월 11일 그들과 같이 남명혁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묵주를 내보이며 자수하였다. 포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하는 수차의 혹형과 고문을 받았으나 기꺼이 이겨내고 9월 26일 66세로 서소문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막달레나 허계임에 대한 기록은 아쉽게도 두 자매를 훌륭히 키우고,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혹형을 기꺼이 받아냈다는 점 밖에 나타나지 않고 있어 성인을 흠모하는 교회로서는 아쉽기만 하다. 그러나 두 순교자의 어머니로서 자신 또한 순교자가 되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신자들의 존경을 받고 그를 따르려는 이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성 세바스띠아노 남이관南履灌은 성녀 조증이의 남편으로 서울의 양반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다. 18세 때 교우 처녀인 조증이와 결혼했으며, 1801년 신유박해로 부친 남필용이 체포되자 처가로 피신했으나 자신도 곧 체포되어 부친은 전라도 강진으로, 자신은 경상도 단성으로 각각 유배되었고 부친은 유배지에서 곧 사망하였다. 그 후 유배생활 30년만인 1832년 대사령大赦令으로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처가인 경기도 이천에서 잠시 살다가 상경하여 처가와 외척이 되는 정하상을 도와 성직자 영입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1833년 의주 변문에서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맞아들여 그에게 성세와 견진성사를 받은 후 회장의 직무를 맡아 열심히 교회 일을 도왔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이천으로 피신하였으나 9월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포청에서 간단한 심문을 받고 형조를 거쳐 의금부로 이송되었으며, 그곳에서 정하상, 유진길 등과 함께 국문을 받은 후 다시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아 9월 26일 59세에 서소문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성녀 율리에따 김율리대金 璃代는 시골에서 태중교우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따라 상경, 서울서 자랐다. 17세때 혼담이 있었으나 수정守貞을 결심, 부모의 혼인 강요를 뿌리치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전부 뽑아 혼담을 중지시켰다. 1801년 신유박해를 겪은 다음 부모는 냉담하여 시골 고향으로 갔으나 그는 홀로 서울에 남아 있다가 궁녀로 뽑혔다. 10년 동안 궁녀생활을 하다가 대궐에서는 신앙생활이 어려워 결국 나와 교구들의 집에서 열심히 일을 해 집을 장만하였다. 홀로 살면서 기도와 교우들을 위한 봉사에 노력했고, 말과 행동에 조심스럽고 성품이 강직하여 교우들로부터 절대로 나쁜 짓이란 하지 않을 여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던 중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7월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매를 맞았지만 순교의 열망으로 불타 있는 그녀의 용기를 앗아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9월 26일 55세에 서소문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녀 아가다 전경협全敬俠은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읜 후 결혼할 나이가 되었을 때 오빠가 결혼을 강요하자 이를 물리치고 궁에 들어가 궁녀가 되었다. 궁녀로서 살고 있을 때 가까이 지내던 박희순을 따라 입교하였다. 그 후 박희순이 자유롭게 천주교를 봉행하기 위해 궁을 떠나자 자신도 병을 핑계 삼아 궁을 나와 교우들의 집에 머물면서 오로지 신앙생활에만 전심전력 하였다. 병을 앓으면서도 불평하는 일이 없었고 궁중의 사치와 풍족한 음식을 그리워하는 일 없이 기쁜 마음으로 투박한 옷을 입고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서 가난을 잘 참아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4월 15일 자신의 처소에 피신해 있던 박희순, 박큰아기 자매와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궁녀의 신분으로 국법에서 금하는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남달리 혹형과 고문을 당하면서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만 번 죽사와도 주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작은 관직에 있던 오빠가 관리를 매수하여 독사毒死, 장사杖死시키려고 하였지만 이것 역시 이겨냈다. 5개월간의 옥고를 참아낸 다음 9월 26일 52세로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 가를로 조신철은 성녀 최영이의 남편으로 일명 덕철이라 했으며 강원도 회양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모친을 잃고 부친이 알마 안되는 가산을 탕진하자 집을 떠나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승려생활을 시작하였다. 몇 해를 승려생활을 하다가 환속을 하고 상경하여 23세 때부터 동지사冬至使의 마부로 일하며 북경을 왕래하였다. 이렇게 북경을 왕래하던 중 정하상, 유진길 등과 알게 되어 입교했으며, 북경에 이르러 성세 견진 성체를 받았다. 그 이후로 계속 마부로 일하면서 북경 교회와의 연락에 정성을 다하였다. 선교사들과 주교의 입국에 적극 협력하였으며 모방신부를 모시고 지방을 순회하며 그의 통역관 노릇을 하였다. 그는 항상 가난한 교우들을 도우며 외교인들을 가르쳐 입교시키는가 하면, 고집이 센 아내를 인내와 노력으로 훌륭한 교우로 만들어 선종케 했다. 아내가 죽은 다음 독실한 교우인 최창흡의 딸 최영이와 재혼하였다. 1839년 봄 북경에서 돌아오던 그는 꿈속에 예수님께서 두 번이나 나타나 "금년에는 순교하는 은혜를 너에게 주겠노라"하시는 말씀을 듣고 땅에 엎드려 감사하였다고 한다. 6월 어느 날 외출했다가 돌아오던 중 처가를 습격한 포졸들이 어린 젖먹이까지 잡아가는 것을 보고 포청까지 따라가 자수했다. 그는 집에서 발견된 성물과 교회서적 때문에 매우 혹독한 형벌을 당했으나 어떠한 형벌이나 고문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끝까지 지키다가 9월 26일 46세에 서소문밖 형장에서 다른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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