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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신구약)/필리피서

[묵상]필리피서와 함께하는 - 같은 -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오늘은 한참만에야 마음에 남는 단어를 찾아 내었습니다. "같은"

첫 느낌은 벌써 사순 3주간이구나 하는 것이였고, 

두 번째는 서로 같을 수 있을까 였습니다.


업무상, 위치상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의견을 조율하고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같지 않음 입니다.

서로 다양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목표나 행동하는 방식도 서로 다릅니다.

그 다름 안에서 하나의 프로젝트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 것은 늘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어떻게하면 그들을 이해 시킬 것인지, 어떻게 이끌고 나갈 것인지를 고민하고 주변에 의견을 청해 볼때도 있지만 그들의 의견 또한 하나가 아닙을 봅니다.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같은 생각을 한다면 많은 부분의 낭비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필립비서에서는 이렇게 같아지는 방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격려를 받고, 사랑에 찬 위로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친교를 나누고 애정과 동정을 나눈다면," 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 끼리라면 일단 한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니 가능성이 보여지지만,

사회에서 만나는 이들과도 이것이 나능할까 하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치네요.


많은 이들이 가톨릭적인 삶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 안에서의 삶으로만 한정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듯 싶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이 머무는 피조물이 가톨릭 신자들 만이 아닌데 말입니다. 저 역시 가끔 그것을 망각할때가 있습니다. ^^;;


<기쁨의 편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곧 신자생활에 요구되는 마음가짐을 네 쌍의 명사로 나열하지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격려', '사랑에 찬 위로', '성령 안에서의 친교', '애정과 동정'을 실천하라고 호소가호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이렇게 느껴 집니다. 

하느님을 알고 있으니 너는 사회에서 생활을 할때 그분께서 그러하시듯

주변에서 만나게 되는 이들을 격려하고,

힘들다고 찾아오는 이들에게는 사랑에 찬 위로를

오늘 같이 회식이 있는 자리에서는 진심어린 친교를

늘 주변 사람들을 바라 볼때는 애정과 동정의 눈으로... 그렇게 바라보라...


가톨릭 신자들 안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것은 어찌보면 쉽습니다.

일딴 바라보는 것이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범위를 확대해보면, 정말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같은 가톨릭 신자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의 일이 된다고 하면 같아 지는 것이 쉽지 않음을 왕왕 보게 됩니다. 하물며 사회에서...


<기쁨의 편지>는 그것을 이웃(사회) 안에서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 "용서"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우리가 꼭 지녀야 할 마음가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족 안에서, 교우 간에, 이웃 간에 참된 친교를 이루려면 마음이 같아야 합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이 '용서'입니다. 한자 자형 풀이를 보자면 누군가의 잘몬을 용서하는 것은 얼굴[容]과 마음[心]이 같아지는 것[如]이네요. 예수님은 더우 국체적으로 용서의 방법을 제시합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불가능할까요? 하느님의 위로와 예수님의 격려와 성령의 작용이 함께 하기에 가능합니다.


또 하루를 시작합니다.

오늘도 많은 이들을 만나고 의견을 나누게 될것입니다. 오늘의 묵상을 생각하면서 그들과 같아지기 위해서 노력해 보겠습니다. 무조건 내쪽으로 끌어와서 같게 만드는 것도, 무조건 나를 죽이고 그쪽으로 모든것을 넘겨 같아지는 것도 모두 아닌듯 싶네요. 하느님의 사랑안에서 그 모든 결정이 선의의 결정이 되길 바래 봅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