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다음 이사짐 미정리/프란치스코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자비의 얼굴』 해설(8) - 자비보다 분노를 멈추게 하는 것이 하느님께 더 쉽다. 21항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자비의 얼굴』 해설(8)

 

자비보다 분노를 멈추게 하는 것이 하느님께 더 쉽다. 21항

 


자비는 결코 정의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다가가시는 하느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에게 참회하고 회개하여 믿도록 하는 많은 기회를 주신다. 호세아 예언자의 경험은 자비가 정의를 뛰어넘는 방법을 알려 준다. 이 예언자가 살았던 시대는 유다인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때였다. 이스라엘 왕국이 붕괴 직전에 있었다. 사람들이 계약에 충실하지 못하여 하느님에게서 멀어져 선조들의 신앙을 잃어
버렸다. 인간의 논리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불충한 이들을 배척하시려 한다는 것이 타당해 보일 것이다. 이들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어겼으므로 그에 따른 형벌, 곧 유배를 당하는 것이 마땅하였다. “그들은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고 아시리아가 바로 그들의 임금이 되리니 그들이 나에게 돌아오기를 마다하였기 때문이다.”(호세 11,5) 그러나 이러한 하느님의 정의로운 질책 바로 다음에, 예언자는 어조를 완전히 바꾸신 하느
님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내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츠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
지 않으리라.”(호세 11,8-9)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마치이 예언자의 말씀에 주석을 다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는 자비를 베푸시는 것보다 분노를 참으시는 일이 더욱 쉬우셨습니다.” 하느님의 분노는 잠시이지만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다.


하느님께서 정의에만 머무르신다면, 그분은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니시고 단지 율법 준수만 요구하는 인간과 같게 되실 것이다. 정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정의만을 요구할 때 결국 정의가 무너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자비와 용서로 정의를 넘어서신다. 그렇다고 정의를 깎아내리거나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정반대다.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 그
러나 이는 끝이 아니라 회개의 시작일 뿐이다. 용서의 온유함을 느끼고 회개를 시작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거부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더 큰 차원 안에 두시고 이를 뛰어넘으신다. 거기에서 우리는 참된 정의의 바탕이 되는 사랑을 체험한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로마 10,3) 하느님의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은총으로 모두가 받은 하느님의 자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 모두와 세상에 대한 심판이다. 이를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과 새로운 삶에 대한 확신을주셨기 때문이다.


대전주보 2015년 연중 제32주일[11월 8일]

곽승룡 신부 / 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