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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칙서『자비의 얼굴』 해설(7) - 정의와 자비는 싸우지 않는다. 20항

프란치스코 교황 칙서『자비의 얼굴』 해설(7)

 

정의와 자비는 싸우지 않는다. 20항

 

정의와 자비는 대립하는 두 개의 실재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충만 속 정점에서 드러나는 유일한 두 차원의 현실이다. 성경은 정의가 하느님의 계명들을 따르는 정직한 이스라엘의 관습이고, 율법의 충만한 준수로서 행동을 말한다. 성경은 하느님의 정의와 판관이신 하느님을 언급한다. 하지만 종종 정의의 본래 의미가 왜곡되고 그 깊은 가치를 모호하게 만들어 율법주의에 이르게 한다. 이를 극복하려면, 우리는 성경에서 정의가 하느님의 뜻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정의는 하느님의 뜻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준수보다 신앙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한다. 예수님은 법 준수를 넘어 신앙의 중요성을 말한다.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이 의문을 제기한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그 의미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예수님은 사람들을 단순히 의인들과 죄인들로 나누는 율법의 준수를 정의로 여기는 관점에 맞서, 죄인들을 찾아 그들에게 용서와 구원을 주는 자비의 위대한 은사를 보여 주신다. 예수님은 자비를 해방 활동과 쇄신의 원천으로 여기셨기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거부당하셨다. 바리사이들과 다른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준수한다면서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가렸다. 율법 준수의 권유가 인간 존엄에 대한 배려를 막아서는 안 된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호세 6,6) 예수님은 몸소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 제자들에게 이제부터는 그 무엇보다도 자비가 삶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시고 이를 몸소 행동으로 보여 주셨다. 자비가 예수님 사명의 근본임이 드러난다. 자비는 율법을 형식적으로만 지키는 이들에게 도전이 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뛰어 넘으신다. 율법에서 죄인으로 여겨지는 이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그분의 깊은 자비를 깨닫게 된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갈라 2,16) 바오로는 이제 율법이 아니라 신앙을 앞세우게 된다.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시는 자비로 구원을 가져다주신다. 성 바오로는 정의가 아니라 신앙을 첫 자리에 놓는다. 하느님의 정의는 죄의 노예들과 억압된 이들을 해방하는 힘이 된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자비이고 정의는 용서다.(시편 51[50],11-16)

 

대전주보 2015년 모든 성인 대축일[11월 1일]
곽승룡 신부 / 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