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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그리고 나/찬미받으소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10-12항]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10-12항]

 

10. 저는 매력적이고 감탄을 자아내는 한 인물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 회칙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로마 주교로 선출되면서 저는 그분의 이름을 저의 길잡이요 영감으로 삼았습니다. 저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취약한 이들을 돌보고 통합 생태론을 기쁘기 참되게 실천한 가장 훌륭한 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생태 분야에서 연구하고 활동하는 모든 이의 수호성인으로 비그리스도인들의 사랑도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피조물과 가난한 이들과 버림받은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사랑을 하였고, 또한 기쁨, 관대한 헌신, 열린 마음을 지녔기에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느님과 이웃과 자연과 자기 자신과 멋진 조화를 이루며 소박하게 살았던 신비주의자이며 순례자입니다. 그는 자연보호,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의, 사회적 헌신, 내적 평화가 어떠한 불가분의 유대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11. 프란치스코 성인은 통합 생태론이 수학과 생물학의 언어를 초원하는 범주에 대한 개방성을 요청하고 인간다움의 핵심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와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 성인은 해와 달 또는 가장 작은 동물을 바라볼 때마다 모든 피조물과 함께 찬미하며 벅찬 노래를 불렀습니다. 성인은 모든 피조물과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꽃 앞에서 설교하면서 "꽃이 마치 이성을 지닌 듯 주님을 찬미하도록"* 초대하였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그의 반응은 지적 평가나 경제적 계산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모든 피조물은 사랑과 유대로 자신과 하나 되는 누이였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돌보아야 한다는 소명을 느낀 것입니다. 그에 제자인 보나벤투라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는 만물의 공통 원천에 관한 성찰로 더 큰 경외심에 가득 차 아무리 작은 피조물이라도 '형제'나 '누이'로 부르고는 하였습니다."** 그러한 확신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선택에 영향을 주기에 순진한 낭만주의로 폄훼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연과 환경에 접근하면서 이러한 경탄과 경이에 열려 있지 못하고, 세상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형제애와 아름다움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즉각적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는 지배자, 소비자, 무자비한 착취자의 태도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것과 내밀한 일치를 느낀다면 절제와 배려가 곧바로 샘솟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청빈과 검소는 피상적인 금욕주의가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곧 실재를 단지 이용하고 지배하는 대상으로 삼는 것을 단념하는 것입니다.

* 첼라노의 토마스,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 1'(Vita Prima di San Francesco), ⅩⅩⅨ, 81, FF 460

** 보나벤투라, '프란치스코 성인의 주요 전설'(Legenda Major), Ⅷ, 6, FF 1145.

 

12. 더 나아가 성경에 충실한 프란치스코 성인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선함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는 놀라운 책으로 자연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합니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습니다."(지혜 13,5). 확실히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로마 1,20 참조). 이러한 이유로 프란치스코 성인은 수도원 정원의 일부를 언제나 손대지 않은 상태로 놓아두어 거기에 들꽃과 목초가 자라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 사람들이 그러한 아름다움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찬미하게 한 것입니다.* 세상은 해결해야 할 문제 이상의 것으로, 감사와 찬미로 관상해야 하는 기쁜 신비입니다.

* 첼라노의 토마스,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 2'(Vita Prima di San Francesco), CⅩⅩⅣ, 165, FF 750 참조.

 


출처 : 한국천주교주교회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조화와 균형. 자연과 인간뿐만 아니라, 나의 삶 안에서 무언가를 선택할 때 꼭 필요한 단어.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균형으로 넘어가기 전에 나의 삶 자체는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 본다. 내가 조화롭지 않은 상태에서 추구하는 조화는 조화롭지 않음으로 끝맺을 가능성이 높다. 내가 균형 잡혀 있지 않다면 결국 어느 쪽으론 가 치우치기 쉽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세상에 조화와 균형에 참여하고 싶다면, 나 자신부터 조화와 균형을 이룬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겠다.

조화와 균형. 그런데, 나는 무엇이 조화로운가? 무엇이 균형 잡힌 것인가? 는 알고 있는 것일까? 이 두 단어에 대해서 조금 더 싶게 묵상해 봐야겠다.

 

실재를 단지 이용하고 지배하는 대상으로 삼는 것 

결국 돌려서 선택한 단어이지만, 착취라는 단어로 귀결된다. 우리는 무언가를 얼마나 착취하고 있는가? 그것에는 나 자신도 포함한다.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먹고살기위해,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욕심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갉아먹고 있는 생명의 시간들도 포함된다고 본다. 나는 나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고 있지 않은가? 하느님이 주신 생명을 허비하고 있지 않은가? 출발점은 나 일수밖에 없다. 쓰레기를 하나 주워도 그것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 변화의 시작은 바라봄에서부터 이지 않을까?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을 멈추고 하늘을, 풀 한 포기를, 돌멩이 하나를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바라봄에서 사랑이 생긴다. 바라봄에서 관심이 생긴다. 알지도 못하는 대상을 사랑하게 될 리 없지 않은가? 잠시 멈추자. 삶을 일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