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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그리고 나/찬미받으소서

제1장. 공동의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17항~19항]

제1장 

공동의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17. 인류 역사상 여러모로 전례가 없었던 우리의 현재 상황에 대한 새로운 분석에 근거하여 신학적 철학적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성찰은 지루하고 추상적인 것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속해 있는 세상을 마주하여 신상이 어떻게 새로운 동기와 요구 사항을 부여하는지에 대하여 성찰해 보기 전에, 우리의 공동의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8. 인류와 지구의 변화가 지속적으로 가속화되는 것은 오늘날 삶과 노동의 더욱 빨라진 흐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를 '신속화'(rapidacion)라고 칭합니다. 비록 변화가 복잡계의 역학에 속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 활동이 발전해 온 속도는 생물학적 진화의 자연스러운 느린 흐름과 대비됩니다. 게다가 이러한 빠르고 지속적인 변화가 반드시 공동선이나 통합적이고 지속 가능한 인간 발전을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변화는 바람직한 것이지만 세상과 많은 인간들의 삶의 질을 악화시킨다면 근심거리가 됩니다.

 

19. 진보와 인간 능력을 비이성적으로 확신하던 시기가 지나서 이제 사회 한쪽에서는 더 비판적인 접근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진심 어리고 애틋한 관심과 더불어 환경과 자연 보호에 대하여 사람들이 더 민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더 이상 감추어 둘 수 없는 이러한 문제들은 매우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정보 축적이나 호기심 충족이 아닙니다. 오리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통렬하게 자각하고 그것을 기꺼이 우리 자신의 고통으로 삼아 우리가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입니다.

 

출처 : 한국천주교주교회의·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우리 공동의 집이 어떠한 상황인지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많지만, 세상은 우리의 시선을 돌리고 있다. 당장 먹고 사는 것에 집중하도록, 당장의 쾌락에 집중하도록, 그리고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무기력함 속에 매몰되도록...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 느끼고 실천이 바뀌기 까지는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 

무언가를 할 수 없어 포기하는 마음들이 모여 있는 시대에, 자신을 성찰하고 변화를 이끌어 내기란 어찌 보면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내일 나 자신의 죽음에도 무관심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자연의 외침이 귀에 들어오기나 할까?

 

사람들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포기하고, 오늘의 기쁨만을 찾게 되었을가?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나 역시도 별반 다르지 않을까? 나로인해 소비되고 낭비되는 것들을 바라본다. 인지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아니 어찌 보면, 고민하는 것부터, 생각하는 것부터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바쁨 속에서 나를 꺼내서 생각이라는 것을 하면서 살게 하는 것이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